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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mouse Feb 19. 2020

"분명, 데이터가 잘못됐을거야"

영하 32도의 노스 다코타로 현장실사를 나가다

투자의 귀재로 알려진 워런 버핏(Warren Buffett)에게 30년 전 1달러를 투자했다면? 아마 지금쯤 107배의 수익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27,000배의 수익을 달성한 헤지펀드가 있다. 워런 버핏의 250배, KOSPI의 640배의 수익률을 달성한 퀀트 트레이딩의 절대 강자, 르네상스 테크놀로지(Renaissance Technologies)의 메달리온 펀드(Medallion Fund)가 바로 그것이다. 그럼에도 이 메달리온 펀드는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일까? 그건 바로, 수익률이 입증된 후 초기 외부인의 투자금을 반환하고 임직원만이 펀드에 투자할 수 있도록 제한하여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1을 투자했다면?


메달리온 펀드는 과연 어떻게 30년간 지속적인 초고수익을 달성한 것일까? 퀀트 트레이딩은 데이터 패턴을 분석하여 자산 가격의 상승/하락 가능성을 예측한다. 그리고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개발하여 투자를 단행한다. 즉,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기계적 계산 논리에 의존하여 투자하는 트레이딩 기법이다. 저명한 수학자였던 짐 시몬스(Jim Simons)는 헤지펀드 설립 후 초일류 아카데믹만을 리크루팅 하여 진정한 퀀트 트레이딩을 실현해낸 것이다.


그런데 퀀트 트레이딩의 정점에 있는 메달리온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인간의 주관적 판단과 경험에 의존했다.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메달리온의 트레이딩 알고리즘은 가격 폭락에 대응하여 자산 매수 전략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매수에도 연일 펀드 가치가 폭락하자 헤지펀드 내에서는 트레이딩 알고리즘에 대한 불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헤지펀드 임원진은 알고리즘의 매수 추천에 역행하는 매도 전략을 단행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만약 수십 년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개발된 트레이딩 알고리즘을 신뢰했었다면, 자산을 지속 매수하고 보유했었다면? 메달리온의 수익률은 무려 27,000배를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이번 글에선 데이터에 대한 불신, 객관적 팩트를 눈앞에 두고도 신뢰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내가 경험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Medallion Fund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2019년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The man who solved the market"을 강추한다.



데이터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얘기한다.

새로 부임한 사업부장이 사업부 진단을 의뢰했다. 각종 데이터를 확보하여 객관적인 현황 진단을 시작했다. 그리고 중간 보고. 팀의 데이터 분석 결과는 클라이언트 임원진과의 사전 인터뷰에서 파악했던 예상 운영현황보다 훨씬 부정적인 모습을 암시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 반복 확인을 했지만 데이터와 분석 논리에는 문제가 없었다. 나는 평소보다 더 긴장한 채 보고를 시작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클라이언트의 질문 공격이 시작됐다.

"내 지역에 저렇게 많은 초과 인력이 있다고? 언제 적 데이터를 사용한 거야?"

"데이터가 잘못됐을 거야. 저게 사실이라면 우리 매니저들이 가만히 안 뒀을걸?"

"개선 기회가 있다는 건 인정하지만 저 정도라고? 확실해?"


신임 사업부장 앞에서 자신의 지역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임원들의 주요 공격 대상은 데이터의 정확성이었다. 여러 개의 전산시스템에서 개별 주문 단위의 디테일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통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용히 임원진의 반응을 지켜보던 신임 사업부장이 말을 꺼냈다. 현장실사 기간을 연장하자고. 3-4일 정도 짧은 현장실사를 계획하고 있었던 우리 팀은 클라이언트와의 협의 끝에 현장실사를 배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추가된 노스 다코타 주(North Dakota)로의 현장실사.


미국 최북단에 위치한 North Dakota


영하 32도. 현장실사를 나가다.

미국 최북단에 위치한 노스다코타의 겨울은 혹독했다. 내가 사는 시카고의 겨울은 이 곳에 비하면 한여름이다. 현장방문 전날, 폭설로 직항 비행기가 취소되어 조금 더 남쪽에 위치한 미니아폴리스 공항으로 비행경로를 변경했고, 미니아폴리스에서 3시간 거리의 목적지를 향해 렌터카를 빌려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목적지를 한 시간 정도 남기고 고속도로가 폭설로 닫혀버렸다. 나는 고속도로 갓길에 늘어선 대형 트레일러들 사이로 조심조심 국도로 빠져나왔고, 3-4번의 만실 모텔을 방문한 끝에 빈방이 있는 모텔을 찾아 피신할 수 있었다. 오래된 미국 영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그런 모텔이었지만, 내게 방키를 줬던 모텔7의 직원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다음날 새벽 일찍 목적지를 향하여 다시 운전대를 잡은 나는 무사히 현장실사를 마칠 수 있었다.


고속도로가 닫힌 늦은밤, 나의 피신처 Motel 7. 영하 32도 이른 새벽엔 자동차 안에서도 방한복을 착용해야 한다.


역시 데이터는 우리가 보지 못한 현장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현장실사 결과 잘못된 고객 주소를 방문하는 테크니션, 특정 시간대에 자리에서 사라지는 엔지니어, 매일 1시간씩 지각하고도 오버타임을 지급받는 직원 등 데이터가 그려줬던 현상들을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현장 실사를 다녀와 보고를 한 후에는 클라이언트 임원진들도 데이터 분석 결과를 신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실시간으로 인력 관리를 할 수 있는 디지털 툴을 개발하여 전국적으로 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데이터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나타낼 때, 우리의 '본능'은 우선 데이터를 공격하는 것 같다. 덕분에 난 영하 32도에 떠난 잊지 못할 출장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이 글을 쓴 사람 'Droneboy'는,

한국에서 스타트업과 경영 컨설팅을 경험한 후 미국 Chicago Booth MBA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미국 시카고에서 아내 'Silvermouse'와 두 딸과 함께 살고 있으며, 경영 컨설팅 일을 이어서 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한 때 작가가 꿈이었는데, 브런치를 통해 나의 일하는 이야기, 가족 이야기, MBA 경영 지식 소개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필명 '드론보이'는 드론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을 즐기는 저를 위해 아내가 만들어준 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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