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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 Jun 30. 2020

나도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불안증 환자가 읽은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이야기  

 유월의 마지막날을 맞아 상반기에 읽었던 책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올해는 유독 좋은 논픽션들을 많이 읽었는데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책을 쓴 스콧 스토셀은 스스로를 '불안 백화점'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두 살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불안장애를 겪으며 다양한 의사를 만나고 이러저런 약물과 다양한 이론에 근거한 치료법을 접한 사람. 하지만 여전히 불안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 그가 불안에 대해 썼다니 이보다 더 생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책은 스콧 스토셀이 심각한 수준의 분리불안, 구토공포증부터 비행기공포, 발표불안 등을 겪으며 프로작부터 팍실, 셀렉사, 졸피뎀, 자낙스를 먹고 개인상담은 물론 집단치료, 가족상담, 최면치료, 명상요가, 안구운동 민감소실 및 재처리요법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불안과 함께 살아온' 일에 대해 담고 있다. 사실상 그의 생애가 현대의학과 심리학이 불안을 다뤄온 연대기 그 자체인 셈이다.

 책은 일단 불안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저 실존적 조건 중 하나였던 '불안'이 현대사회의 가장 흔한 정신질환으로 발전하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살펴본다. 에픽테투스부터 키에르케고르에 이르기까지 유독 '불안'에 관심을 갖던 철학자들의 시각에서부터 최초로 신경학적 관점에서 불안을 바라본 프로이트의 생각, 임상적 장면에서 DSM 진단기준에 따른 불안장애의 증상까지 말이다. 불안은 만들어진 개념에 불과하다는 일각의 시각 역시 물론이다. 그리고 스콧 스토셀은 자신의 불안이 어디서 온 것인지, 불안장애에 대한 선천이냐 후천이냐 논란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안은 유전된다. 하지만 유전된다는 것이 불안장애 선조를 둔 이가 반드시 불안장애 환자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 이 책은 불안에 대한 대백과사전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아마도 이 책이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평생 불안과 싸워온 사람의 눈물나는 투쟁기라는 인상을 받을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에 정말로 놀라운 점이 있다면 전혀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마도 당신은 이 책을 보면서 울기보단 깔깔 웃게 될 것이다. 그게 불경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말이다. 특히 그의 결혼식과 첫 아이가 태어나던 날들의 이야기(간호사들이 산고 중이던 아내를 내버려두고 그를 돌보아야 했다고 한다), 발표불안과 구토공포증을 동시에(?) 치료하기 위해 행했던 노출요법치료 장면은 정말이지 올해 읽은 문장들 중 나를 가장 많이 웃게했다.

 

 그런데 사실 내가 불안에 대해 얘기할 때면 좀 복잡한 마음이 되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불안은 정말 그 한가운데 있을 때는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지만 그 일에서 몇 발자국만 떨어져도 전혀 다른 감각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내가 불안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나는 내가 불안발작을 겪었던 날들과 그 이후 후유증처럼 남은(그러니까 불안발작보다는 좀 경미하지만 여튼 비슷한 루트로 가고 있다는 사인을 주는) 신체적, 정서적 변화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불안에 대해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나는 불안이라는 감정을 거의 모르고 살았다. 그러니까 갑자기 스물아홉 여름에 이른 퇴근을 해서 매일마시던 카페의 콜드브루를 마시고 알러지 쇼크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서 과호흡이 오고 기절할 것 같아 응급실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재미있는 부분이다. 내 뇌가 혹은 내 마음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상당부분 ‘문제가 있는 상태’로 살아온 사람이다.

 이십대의 나는 거의 내내 잠들지 못한 채로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 PTSD 환자였다. 당시의 나는 우울했고 강박증에 시달렸고 잠을 못 잤다. 하지만 아무 이유없이(혹은 어떤 이유의 조짐만 보인다고 해서) 불안하진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내가 죽을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 심장이 조여오고 숨을 못 쉴 것 같다거나 여기서 바닥으로 쓰러져 기절해버릴 것 같단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우울증에 걸려있던 시절에 나는 한편으로 굉장히 담대했다. 내 인생이 어떻게 되건 내 알바가 아니라는 뒤틀린 태도였다는 것이 문제긴 했지만 말이다. 여튼 불안하진 않았다. 나는 그 때는 사람들 앞에서 나설 때 약간의 긴장도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극장이나 좁은 지하주차장에 가는 것만으로 숨이 가빠지면서 이게 무너지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을 하는 걸 막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식은땀이 나고 배가 싸해지는, 주유소에 딸린 자동세차장에 들어갔다가 호흡 곤란을 겪으며 패닉에 빠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는 이 이야기를 쓰는게 별로 슬프지 않다는 사실이다. 솔직히 뭐 그렇게 참담하지도 않다. 나의 다른 정신병리에 대해 이야기 할 때와는 아주 다른 반응이다. 심지어 나의 우울증과 강박증은 지난 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편이다. 우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를 우울하게 하고 울게도 한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불안발작이나 불안발작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상황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얘기할 때면 나는 오히려 어떤 시트콤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하다. 그래서 친구 하나는 그렇게 묻기도 했다. “ 근데  얘길  그렇게 웃으면서 ?”라고. 그러게.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근데 그렇게 된다. 불안에는 정말로 우스운 구석이 있다. 처음 불안발작으로 응급실에 가던 날, 나는 비스듬히 누워 남편을 바라보며 속으로 ‘아, 어떡하지. 우리 지난주에 혼인신고 했는데 쟤는 이제 나 없이 홀아비가 되겠구나’ 뭐 그런 걱정을 했었다.(아니 그러니까 숨이 안 쉬어지는 거 아닌가?!) 근데 돌이켜 생각할 때마다 그 대목이 너무 웃긴거다. 아니 정말 별 걸 다 걱정했구만! 싶달까.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헐떡이고 있을 나를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럽기도해서 사실 머쓱한 기분이 되기도 한다.

 이 책을 보면서도 그랬다. 이 책은 정말 웃기다. 이 사람이 겪은 고통을 우습게 혹은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렇다. 불안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스운 구석이 있다. 사람이 안절부절 못하고 쩔쩔매고 전전긍긍하는 장면을 그려볼수록 더 그렇다. 오, 물론 안다. 그게 바로 내 일일 때는 그 생각 때문에 더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는 것을. 하지만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럴까. 대체 뭐가 문제일까를 생각할수록 나는 불안이라는 개념 혹은 정서 혹은 질병에 대해 우리가 뭔가 속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기분(아니면 속이고 있는 걸까?)과 인간종에 대한 연민이 커져만 간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읽으며 짓게 되는 웃음은 무시나, 조롱 같은 것이 아니라 공감과 연민 그리고 궁금증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책에서 불안이라는 개념의 기원과 정체를 설명하던 스콧 스토셀은 흔히들 불안과 가장 많이 비교하는 개념인 공포를 들어 불안의 실체를 밝힌다. 우선 공포는 명확한 상대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두렵고 위험한 상황이 닥쳤을 때 자아내는 감정이다. 하지만 불안은,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어떤 가능성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기적이고 미래를 향해 있는 정서다. 그러니까 인간은 왜 실체도 없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걸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라고 한다. 세상에, 인간은 도대체 뭐가 잘못된걸까!!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자들의 말 그대로 자유를 누리는 댓가로 얻은 책임의 무게를 실감한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불안인걸까! 아니 자동세차장에서 그런 걸 느낀단 말이야?! 정말 문제다 문제야!! 인간만큼 안쓰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이런 마음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불안장애에 쓰인 약물들의 역사와 불안의 유전에 대해 할애되어 있는데 사실 내가 이 책에서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는 불안에 대한 책을 꽤 많이 읽었다. 방어기제 중 하나인 지성화의 작업으로도 볼 수 있다.) 특히 유전에 관한 것. 불안은 정말 유전되는걸까. 그렇다면 내가 내 아이에게 뭘 물려준걸까, 하는 근원적인 불안이 내게는 있다. (잘들 읽어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불안장애를 겪는 이의 사고회로다.) 임신 내내 아이가 남편 성격을 닮았으면 좋겠다고 우스갯소리처럼 했지만 거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여전히 나를 좋아하지만 나의 모든 면을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늘 궁금했다. 내가 불안장애를 겪게 된 건 스물 아홉살의 일이었다. 그 전에는 전혀 없었는데. 그러면 그 이후에 태어난 아이에게 나는 불안의 유전자를 물려준걸까? 아닐까? 그럼 내게도 원래 불안의 유전자가 있었던걸까?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어떤 환경적 조건에서 트리거가 눌려 발현된 것일까? 기타등등 기타등등.

 거두절미 하자면, 불안은 유전된다. 유전될 수 있다. <우울할 땐 뇌과학>등에도 여러 번 언급된 내용이다. 유독 우울이나 불안을 자아내는 하강나선에 익숙한 뇌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내용들을 읽을 때마다는 좀 처참했다.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유전을 그렇게 운명론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해. 그게 어떤 환경을 만나서 어떤 복합적 맥락속에서 발현되느냐를 전혀 간과한 거라고. 유전은 반드시 그런 삶을 살게 된다는 결정론이 아냐.”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정신적으로 별로 좋지 못한 시기를 통과하던 시기에 내 책상에는 이런 문구들이 붙어있었다. "It doesn't make sense because it doesn't make sense!"(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의 한 문장이다.) ,"Life has a gap in it. It just does. You don't go crazy trying to fill it."(영화 Take a waltz의 주인공 누나가 하는 대사다),  "나는 나이고 나는 괜찮다."(SNS에서 어떤 분의 바이오에서 보고 옮겨둔 문장이다.) 지금도 가끔씩 되뇌어보고 소리내보는 문장들이지만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그리고 불안이 유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후론 한 두 문장이 추가됐다. "바당이는 내가 아니다", "바당이의 미래는 나의 과거가 아니다."

 하지만 솔직히 털어놓자면 바당이가 한창 내가 이 책을 읽던 시점에 무서운 꿈을 꿨다며 울고 그 후로 가끔씩 잠이 들기 직전이면 꿈을 안 꾸는 방법은 뭐 없냐고, 또 무서운 꿈을 꾸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또 그럴까봐 잠자는 게 무섭다며 울먹일 때 나는 두려웠고 또 좌절했다. 스콧 스토셀 역시 자신이 최대한 자신의 불안증을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딸 마렌이 비행기 타는걸 두려워하고 이륙 전 나오는 안전 수칙이 신경쓰인다고 안전하면 그걸 왜 보여주는거냐며 울 때 절망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유일하게 이 부분에서 울었다. "휴, 정말 피는 못 속이는 걸까."

 바당이가 악몽에 대해 물을 때 내 솔직한 심경도 비슷했다. 원하지 않는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이십대 내내 돈도 시간도 너무 많이 썼음에도 답을 못알아내서 여전히 그게 뭔지 궁금하고 한 번씩 억울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래도 아이를 안심시켜야 하는 게 내 몫이니 "괜찮아. 오늘은 무서운 꿈 안 꿀거야.", "엄마가 바당이 꿈 속에 갈게. 가서 바당이 지켜줄게.", "괜찮을거야"같은 말을 최대한 진심을 담아서 해봤지만(알겠지만 이건 정말 진심이다. 나는 나와 다르게 바당이는 괜찮다고 또 괜찮을거라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래야 내가 괜찮을 수 있으니까.)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로, 아니 텅 빈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아이가 알아챌까봐 불안했다. (세상에! 이제 알겠나 불안장애를 겪는 사람의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스콧 스토셀은 아이들과의 일화를 털어놓은 뒤 주석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아이들 둘 다 어릴 때 불안 증세 때문에 심리 치료를 받아서 지금은 몇 년 전보다 훨씬 덜 불안해한다. (...) 아마 기질적으로 보면 평생 불안을 많이 느끼며 살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나는 아이들이 두려움을 잘 다스리고 생산적으로 다루어 불안한 기질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가리라 기대하고 소망한다." (책의 속지에는 마렌과 너세니얼에게 너희들은 무사하길 이라고 적혀있다.)


 나는 극복한다는 서사에 반감이 있다. 삶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들은 전혀 극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사건들의 잔재들, 그 사건으로 촉발된 변화들도 마찬가지다. 나 역시 나의 어떤 부분들을, 내 인생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들을 극복한다는 이야기를, 그걸 딛고 더 나은 내가 된다는 류의 순진한 성장담론을 거부한 사람이다. 내가 비관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이건 어떤 패배주의나 무력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 선택은 오히려 실용주의에 가깝다. 극복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것을 분류하는 작업인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게 인간의 생애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냥 내 불안과 우울과 기타 등등을 관리하면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번역이 참 좋다. 나는 불안과 ‘함께’살아간다. (원제는 My age of Anxiety. 원제도 훌륭하다.)

 극복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내 삶에서 쫓아낼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살펴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친구들과 코로나가 한창 시작되던 시기에 그런 이야길 나눴었다. 불안도 능력이라고.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순간을 예민하게 감지해내는 것. 그래서 어떤 위험이 현실이 되기 전에 거기에 대비하는 것.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인간만이 불안해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불안이 노벨상을 안겨준다거나 어떤 위대한 창작물, 엄청난 결과에 반드시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불안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불안과 지성이 연결되어 있고 불안이 윤리적 행동과도 관계가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불안에 침식되지 않고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은 채로 그것과 함께 살아갈 방법을 여전히 궁리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난 여전히 우리가ㅡ그러니까 스콧 스토셀도, 나도ㅡ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본다. 무엇에 대해 말하고 쓴다는 것은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까뮈는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애착에는 세상 모든 비참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고. 그 말을 고든 w 알포트 식으로 해보자면 이렇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뭔가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쓸 수 있다면-그것도 약간의 유머를 곁들여서- 아직은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게 설령 '불안'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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