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상한 사람은 아닙니다
나는 베테랑 환자였다.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랐다. 우선 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먹었고 상담을 미루지 않았고 카페인도 완벽하게 끊었다. (*다수의 연구가 불안민감도가 높은 사람의 경우 카페인에 민감하게 반응할 확률이 높으며 카페인으로 인한 두근거림 등의 증상을 불안장애 증세로 오인하게 되는 등 심리적 불안을 야기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불안장애와 카페인 간의 인과관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는 상담실에서 내 이야기를 할 때 쭈뼛대거나 괜히 주변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 낭비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불안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내 신체화 증상과 달라진 일상을 주어진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설명하는데 능했고 몇 가지는 에피소드화해서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먹고 마시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져 주위에서 기아체험하냐는 타박을 듣던 그 시기에 내가 만나는 친구란 회사의 동기들이 전부였는데 우리는 그 때 모두 힘든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서로를 병명으로 부르고 함께 모여 약을 챙겨 먹고 병원 일정을 챙겨주는 등 유사 자조모임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나는 가끔 내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좀 재미있는 기분이 되었다. 간만에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처럼 들뜨기도 했다. 얘들아, 내가 재밌는 얘기 해줄까? 나 저번날 SFC에서 불안발작 왔잖아!!! 거의 그런 태도였다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사실 몇 년 후였는데 그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로서도 설명하기가 굉장히 곤란한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다른 정신병리와 불안을 다루는 내 태도가 정말이지 너무나도 달랐기 때문이다. 이십대의 나는 거의 내내 잠들지 못한 채로 약을 먹고 상담을 받는 PTSD 환자였다. 당시의 나는 우울했고 강박증에 시달렸고 잠을 못 잤다. 하지만 아무 이유없이(혹은 어떤 이유의 조짐만 보인다고 해서) 불안하진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거나 내가 죽을 것 같단 생각이 들면서 심장이 조여오고 숨을 못 쉴 것 같다거나 여기서 바닥으로 쓰러져 기절해버릴 것 같단 느낌을 받아본 적은 없었다. 극장이나 좁은 지하주차장에 가는 것만으로 숨이 가빠지면서 이게 무너지면 어떡하나 싶은 생각을 하는 걸 막을 수 없고 그러다보면 식은땀이 나고 배가 싸해지는, 주유소에 딸린 자동세차장에 들어갔다가 호흡 곤란을 겪으며 패닉에 빠지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것도 좀 웃겼다. 아니 무슨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사람이 왜 이렇게 된거야? 원래 이럴 수도 있는건가? 뭐 그런 것이다.
지금도 이 이야기를 쓰는게 별로 슬프지 않다. 솔직히 뭐 그렇게 참담하지도 않다. 나의 우울증과 강박증은 지난 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편인데 말이다. 우울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나를 우울하게 하고 울게도 한다. 하지만 내게 일어난 불안발작이나 불안발작으로 이어지기 직전의 상황들에 대해 친구들에게 얘기할 때면 나는 오히려 어떤 시트콤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는 듯 하다. 친구 하나는 내게 그렇게 묻기도 했다. “너 근데 그 얘길 왜 그렇게 웃으면서 해?”라고. 그러게.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근데 그렇게 된다. 불안에는 정말로 우스운 구석이 있다.
무엇보다 불안이 우스운 것은 실체가 없다는 점이다. 불안과 가장 비슷하게 여겨지는 감정은 공포지만 공포는 명확한 대상과 실체가 있다. 실제로 두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떠오르는 감정이다. 하지만 불안은, 그러니까 그런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순전히 주관적인- 어떤 가능성만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예기적이고 미래를 향해 있는 정서다. 인간은 왜 실체도 없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는걸까. 불안을 느끼는 것은 오직 인간 뿐이라고 한다. 세상에, 인간은,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걸까! 키에르케고르와 사르트르같은 실존주의자들은 일찍이 불안이 자유를 누리는 댓가로 얻은 책임의 무게에서 파생되는 것이며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조건이라고 보았다. 세상에. 아니 자동세차장에서 그런 걸 느낀단 말이야?! 정말 시트콤이 따로 없네. 그런 마음이다.
불안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 나를 떠올려보면 그런 감정은 더욱 선명해진다. 캡틴마블의 오프닝 장면을 보다가 너무 시끄럽고 너무 화면이 크단 생각이 들면서 내가 원한건 이런 자극이 아닌데 정말 불필요하다 괴롭다 싶다가 급기야 의식의 흐름이 예전에 다크나이트 라이지즈가 상영중이던 미국의 한 극장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흘러 갑자기 이 극장의 출입구가 다 닫히면 어떻게 나가야 하는지, 여기 건물이 무너지면 어떻게 해야하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고 화장실이 너무 가고싶고 숨을 쉬기 힘든 것 같아서 뛰쳐나왔던 때라든가. 허리 디스크가 의심되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MRI를 찍어봐야 할 것 같다는 도수치료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는 MRI 기계에 들어갔다가 불안발작이 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불안장애를 앓는 이들이 모여있는 카페 글을 검색하고 읽는데 하루를 다 쓴다든가. 아무런 위협도 없는 평온하고 일상적인 상황에서 갑자기 혼자서만 모든 위협의 칼날 끝에 있는 것처럼 구는 나를 볼 때. 나의 어떤 의지나 계획같은 것이 개입할 의사도 없이 거의 반자동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애초에 내 몸에 그런 매뉴얼이 입력되어 있었다는 듯이 구는 나를 볼 때. 아주 작은 조짐이나 불편이 감지되면 0.1초만에 불안의 고속도로에 올라 타 벌써 최악 혹은 죽음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해 있는 나를 볼 때.
뭐가 그렇게 불안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혼자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어. 그런 생각이 든다. 그 때 내가 느끼는 것은 아무래도 연민인 것 같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걸 모르고 혼자서만 분주한 나 자신에 대한 연민. 근데 마냥 불쌍하진 않고 아이고, 야,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아니야, 정말 아니라니까. 너 왜 그래 진짜, 그런 마음이라 웃음이 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돼. 그냥 눈을 감고 숨을 깊게 쉬어 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제발 그러지 말고. 아무리 말해줘도 그걸 못하는 사람을 보면 웃음이 나는 법이다.
아직까지도 정확히 내가 나의 불안에 대해 이야기할 때 웃게 되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가끔은 아무리 그래도, 질병에 대해 웃겨한다는 것이, 웃으며 이야기한다는 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정말 내 불안에 대해 생각할 때 눈물이 나지는 않는걸. 그렇다고 내가 내 불안을, 불안한 나를 희화화 하는 것은 아니다.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없는 걸 보태거나 있는 걸 덜어서 각색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나름대로 내 불안을 직시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럴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본다. 치료를 받으며 꽤 통제가 가능했고 중증으로 번지지 않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방어기제의 일종일까? 별 것 아닌 일처럼 치부하고 싶은 걸까? 다른 사람의 일인 양 거리를 두고 싶은 것일까?
분명한 것은 나는 불안에 대해 할 말이, 하고싶은 말이 아주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에 대해 말하고 쓴다는 것은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까뮈는 이렇게 말했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갖는 애착에는 세상 모든 비참을 뛰어넘는 무엇이 있다"고. 그 말을 고든 w 알포트 식으로 해보자면 이렇다. "신경질환 환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게 되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할 수 있는 상태, 아니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어쨌든 뭔가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쓸 수 있다면-그것도 약간의 유머를 곁들여서- 아직은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닐까. 그게 설령 '불안'일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