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것 같은 VS 죽고싶은
범불안장애 진단을 받던 날의 내 심경은 정확하게는 '억울함'에 가까웠다. 나는 정말 고장난 채로 태어난걸까?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오히려 반대라고 생각해왔다. 나에게는 특유의 강인함이 있다고 말이다. 하루종일 먹지도 못하고 잠도 못자고 울면서 걸어다니기는 했어도, 그 모든 것은 다 트라우마 반응을 일으킨 사건 때문이지 내가 유약해서는 아니었으니까. “PTSD는 유일한 외인성 정신질환”이다.(*정혜신, 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를 위하여』 창비, 95쪽) 이유가 외부에 있는 병증이라는 뜻이다. 우울, 불안, 강박처럼 내면의 갈등이나 심리적 문제 혹은 부조화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다. 그게 환자를 미치게 하는 한편으로 또 살게 한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왜 그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어쨌든 나는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던 사람은 아닌 것이다. 나는 멀쩡한데 그런 나를 무너뜨릴 어떤 사건이 생긴 것일 뿐. 탓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게다가 나는 꽤 괜찮게 해왔다. 어쨌든 살아내지 않았나, 그런 자부심도 있었다. 엄청난 일을 겪고도 나름 잘 버텨왔다는. 그런데 불안장애 진단을 받으니 그냥 애초에 내가 문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원래 취약한 사람인 걸까? 도대체 내 뇌와 신경절달물질에 문제가 생긴 건 언제부터인걸까? 이것도 결국 PTSD의 한 양상인가?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그랬나? 아닌데? 우리 엄마아빠가 문젠가? 아닌데? 우리 엄마아빠는 정말 괜찮은 부모였고 나는 소위들 말하는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애’였는데? 열아홉살 때까지 내 삶은 정말 지금이랑은 달랐는데? 우울을 겪은 사람이 불안에도 취약한건가?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진단 후로 '문제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게 됐다. 물론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쨌든 내 뇌는, 내 신경전달물질은 뭔가 문제가 있긴 한 거니까. 하지만 포도를 먹는 사람이 꼭 '포도 먹는 사람'은 아니듯이 내 어딘가 한구석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내가 '문제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 때부터 나는 내 삶에 새로 등장한 불안과 내 삶의 뒤안길로 (거의) 사라져 간 우울을 두고 열심히 견주어 보았다. 인수분해를 해서 둘의 최대공약수와 최소공배수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들을 내 삶에 적용시켜 나름대로 내 삶을 해석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알게 된 몇 가지 진실은 내 입장에선 꽤 좌절스러운 것들이었는데 요약하자면 우울과 불안은 사실상 동전의 앞뒷면이라는 것이었다.
"우울과 불안은 모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 상승과 관련이 있고, 해마 등 뇌의 특정 부위의 축소 등 신경해부학적 특징도 같이 나타난다. 유전적 뿌리도 비슷하다. 특히 세로토닌과 도파민 등 신경전달물질 생산과 관련이 있는 유전자가 두드러지게 일치한다."
스콧 스토셀, 『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반비, 2015, 62쪽
생물학적 배경이 거의 동일한 우울과 불안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다르게 경험된다고 한다. 또한, 불안과 우울은 순차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며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고 공존 질환으로(진단 당시 둘다 일정 수준 이상인 경우)진단되는 경우도 빈번하다고 한다. 불안한 게 우울하고 우울한 게 불안해지며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며 시너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둘의 케미스트리가 그렇다고 하니 불안과 우울을 모두 겪어본 사람이 그렇게 적은 숫자는 아닐 것 같다.
특히나 범불안장애와 우울증은 유전적으로는 거의 구분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유전학자도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 두 가지를 진단 받아 본 입장에서 불안과 우울은 정말 달랐다. 수면이나 집중력 등에서는 비슷한 특징을 보이기도 하지만 신체화 증상에서는 특히 많은 차이를 보인다.
위장 장애
심박수 증가, 식은땀, 근육의 긴장, 떨림
호흡곤란
현기증
입면, 수면유지에 상당한 어려움
무기력
식욕 상실
불면증 (또는 과수면)
사회적 역할 수행에 어려움
규칙적이고 일상적인 루틴 유지에 어려움
불안의 생리적인 반응은 우울보다 훨씬 격렬하고 숨기기가 어렵다. 말 그대로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능숙하게 가장하는 이라도 호흡곤란이나 근육의 떨림이나 배탈까지 숨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불안과 우울을 가르는 가장 큰 요소는 '죽음'에 대한 태도, 혹은 죽음과의 관계다. PTSD로 심각한 우울을 경험하던 시기의 내 일기장에는 '깨끗하게 죽고싶다'는 말이 빼곡했다. 죽는 것이 가장 깨끗하고 간단한 해결방식으로 느껴졌다. 다행히 자살사고가 심한 편은 아니어서 구체적인 방법을 찾거나 도모하는데까지 가진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그 때 죽음과 나를 가깝게 느꼈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면 그 때 나는 죽음조차도 강렬하게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내 인생이라는 것을 아무렇게나 널어놓고 대충 쳐다보고 있는 쪽에 가까웠는데, 그러니까 어떤 기회가 있다면(?) 죽어도 괜찮겠다거나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삶에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내가 부러 노력해 다가가지 않아도 어차피 죽음이 늘 내 주위를 맴돌고 있으며 계속해서 내게 그림자를 뻗어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범불안장애 환자로서 내가 죽음과 맺는 관계는 완전히 다르다. 불안이 어떤 임계점을 넘을 때(불안해진 것 같다, 불안한 것 같다고 느낄 때부터 주로 3분 이내다), 나는 곧장 내가 죽을 것 같다고 느낀다. 특히 호흡이 가빠질 때(불안하면 나는 거의 바로 이쪽으로 간다.) 나는 이것을 거의 매번 죽음의 징조로 해석한다. (이렇게 쓰니 꽤 그럴싸해 보이는데 정확하게는 심장마비의 징조라고 써야한다. 나는 거의 아, 정말 이번엔 진짜 심장이 잘못됐나봐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단순히 불안이 자아내는 완전히 허구의 감각은 아니다. 불안장애 환자들은 '신체화 취약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거기에 '신체 증상을 파악하고 해석하는 데 인지적 편견'까지 갖춘 존재들이다. 생리적으로 사소한 변화가 있어도 이를 과도하게 의식하며(범불안장애 진단을 받았을 당시 나는 정말로 내 식도부터 위를 세세하게 다 느끼며 살고 있었다) 이런 증상을 늘 어떤 병증 혹은 죽음과 연결지으며 최악의 시나리오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죽음은 저기 멀리서 그냥 가만히 서 있는데 불안의 고속도로에 올라탄 내가 전속력으로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기분이다. 그 와중에 죽을 것 같아, 아무래도 이번엔 맞는 것 같아, 이번엔 정말 숨을 못 쉴 것 같아!!! 소리소리를 지르면서 말이다. 죽음도 정말 답답할 노릇일 듯. 자긴 가만히 있었는데 쟨 또 왜 저러나, 그런 심경이지 않을까.
우울과 불안이 자매이자 형제이며 가장 절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게된 후로부터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이십대 때 되도 않는 과장된 담대함으로 힘을 잔뜩 주고 살다가 조금 괜찮아지니까 거기서 뭔가가 새기 시작한 것 아닐까. 그렇게 내 마음 속 깊이 가라앉아있던 불안이 그 틈새를 비집고 드디어 빠져나오게 된 것 아닐까. 나는 선생님께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그런 거 아닐까요? 사실 그 때는 우울이 불안을 압도했던 거 아닐까요? 그 때도 제가 불안하긴 했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하나도 안 불안할 순 없었겠죠? 악몽이 늘 같았거든요. 그 꿈에서 깨도 한참이 지날 때까지 저는 현실로 잘 돌아오질 못했고 침대에 딱 붙은 채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채로 누워있었거든요. 생각해보면 그게 지금의 증세랑 비슷한 것 같아요. 제가 제 불안을 억누른 거 아닐까요? 그것까지 떠오르면 정말이지 버틸 수 없을테니까? 그래서 우울이 한 풀 꺾인 지금 불안이 떠오른 거 아닐까요? 선생님이 뭐라고 했더라. 우리 선생님의 평소 태도로 미루어 짐작컨대 한아씨, 중요한 건 구분이 아니에요. 제가 이 두 가지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 건 한아씨가 그걸 명확히 구분해야 하거나 구분했어야 한다는 게 아니에요. 지금 한아씨에게서 어떤 증상들이 나타나는지, 증상의 존재 유무를 파악하자는 겁니다. 치유적인 태도라는 건 그런거에요. 이유나 선후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아마도 그렇게 얘기했을 것 같다.
나는 선생님 말을 잘 따르는 환자이기 때문에 선생님 말대로 하려고 노력한다. 노력중이다. 이유나 선후는 중요하지 않다. 치유적인 태도란 그런 것이다.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지 말자. 지성화 작업을 방어기제로 쓰지 말자. 불안과 우울에 대해 그만 찾아보고 그만 생각하고 그만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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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대로 일어나기를 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 에픽테토스, 엥 케이리디온 : 도덕에 관한 작은 책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 그건 어떤 것일까. 불안장애 환자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문장을 쓰는 것부터가 일단 많은 노력을 요한다. 무엇이 일어난단 말인가. 왜, 언제, 어떻게. 그런 질문들이 비엔나 소세지처럼 줄줄이 따라붙으며 거기에서 또 가지치기를 해서 금세 모니터를 꽉 채울 정도의 불안의 마인드맵이 완성된다. 그래도 나는 한창 친구들에게 이 말을 편지의 마지막 인사로 쓰곤 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그것은 사실은 나를 향한 주문이자 기도에 가까웠다. 아마도 그런 수준의 담대함을, 내가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은 불가능할테지만. 그래도 나는 가끔 그 말을 입안에서 굴려본다. 나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거지! 아무래도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