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제 얘기 좀 들어보세요
올 여름의 일이다. 나의 불안과 우울의 친구 D에게 나는 누군가의 흉을 보았다.
"아니 정말 보통 사람들은 불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나? 왜 이렇게 막말을 해?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안 불안한 상태에 대해 아무 말 안하고 입다물고 있는 것처럼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거야? 심지어 나는 안 불안해본 역사가 있는데도 가만히 있잖아! 그게 어려워?"
그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불안이란 이러이러한 것 같다고, 불안한 사람들이란 사실 이러이러한 사람들인 것 같다고. 자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렇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불안에 대해 나름대로의 통찰을 발휘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는데 불안장애를 경험했던 내가 보기에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불안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와 환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오히려 김이 새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불안이 컨트롤 가능한 감정이며 그 정도(intensity)를 조절할 수 있는데 괜히 그런다고 생각하는 이들 말이다. 그러니까 불안발작을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거나 그것 때문에 상담사나 의사를 찾아갈까 고민중이라고 털어놓으면 네가 너무 생각이 많아서 그렇다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을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여서 문제라거나, 원래 똑같은 상황에서도 유독 어두운 그늘을 잘 찾아내서 그 쪽으로 흘러가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혹은 그런 쪽에 더 끌리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거나, 뭐 그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도, 아는 사람들로부터도 수없이 들어온 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 역시도 가끔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다. 불안이라는 건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착각 같은 것 아닐까. 정말로 실체가 있는 게 맞을까. 특히나 가끔 불안의 조짐이 보일 때, 심호흡을 하고 불안감을 초래한 자극을 차단하고 나에게 도움이 되는 말들을 반복해 불안이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것을 막는데 성공할 때면 더욱 그랬다. 뭐야, 심해지기 전에 괜찮아졌잖아? 약 없이도 되잖아?(나는 진단 후 1년 여간만 항불안제를 복용했다.) 그럼 이건 애초의 내 '마음 먹기'의 문제라는 것 아닌가? 싶으면서 나를 의심한다. 내가 정말 불안한 게 맞나? 그런데 비슷한 상황인데 이번엔 괜찮았는데 왜 저번엔 불안했지? 이럴 수도 있나? (그럴 수 있다고 한다. 불안 역시 비정형적일 수 있다.) 실은 나는 그냥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내가 불안한 사람이라는 내 생각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불안민감성이 높은 사람은 '내수용성 지각'이 높다. 몸의 내부작용, 즉 자신의 심장 박동, 혈압, 체온, 호흡수, 소화관의 움직임을 다른 사람보다 훨씬 많이 의식한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아주 작은 변화에도 불안해지며 이는 곧 몸 안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더 강렬하게 느끼게 만들고 이는 결국 공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불안의 나선 효과가 완성되는 공식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런 믿음과 의구심들로부터 매번 상처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내 자신이 나의 괴로움에 대해 한 번씩 그렇게 의심 섞인 눈초리를 한다는 것은 사실 조금 힘든일이다. 거짓말쟁이가 된 기분이다. 사기꾼이 된 느낌이다. 내 고통이 진짜이며 내가 이 고통을 악세사리로 생각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여기에는 내 의지가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으며 정말로 괴롭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피고인이 된 기분이다. 원래 다른 곳이 아파도 이런가? 물론 모두에게 이해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이제 나는, 내가 나를, 나의 불안이나 내 마음의 상태같은 것을 100퍼센트 이해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그게 어떤 면에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불안을 모르는 이가 불안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불안이나 우울을 경험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까지 밖에는 알 수 없는 존재라고 거의 단정짓게 되었다. 전문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은 치료자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다른 무지와는 달리, 어떤 고통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잘못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이 건강한 이들을 부러워하듯이, 나는 정신이 건강한 이들 또한 부러워한다. 심장이 조여오는 느낌, 아주 사소한 A에서 거의 일어난 확률이 없는 Z를 감지하는 대단한 과민함, 아무래도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것 같다는 확신. 사람이 굳이 살면서 그런 느낌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모른다면 굳이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사람들이 불안이라는 것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도 나름의 이유라는 것은 존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엔 불안에 관해 아주 유명한 몇 가지 명제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 때문이 아니라 그 대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때문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에픽테토스, 불안에 관하여
에픽테토스의 문장에는 '불안'에 관한 통찰이 담겨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동시에 어떤 착오를 일으킨다. 대상이 아니라 대상에 관한 생각이 문제라는 것은 예리한 말이지만 '그 대상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결정짓는 것은 불안장애 환자의 몫이 아니다. 거기에 어떤 자유의지가 있어서 불안장애 환자가 모든 일에 대해 늘 피곤하도록 나쁜 쪽으로 생각하고 별 일 아닌 것에서도 슬픔과 비극의 그림자를 발견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정말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은 생각이나 사고의 흐름이 아니며, 그것을 누군가가 주도해서 생겨나는 것은 더욱 아니다.
"걱정과 불안은 다르다. 걱정은 주로 생각을 기반으로 하는 데 비해 불안은 신체감각(예컨대 복통)같은 육체적 요소나 관련 행동(상황을 회피하는 것 등)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걱정은 전전두피질이 관장한다. (...) 그러나 불안은 오직 변연계가 담당하며 주로 편도체와 해마, 시상하부 사이의 상호작용이 중요하게 관여한다. 한마디로 걱정은 잠재적 문제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고 불안은 잠재적 문제를 느끼는 것이다."
알렉스 코브, 『우울할 땐 뇌과학』심심, 103쪽
불안에 대해 많은 글을 읽었지만 나는 이 단락이 가장 명쾌한 설명이라고 느낀다. 불안은 생각이 아니라 신체감각에 가깝다. '마음'이라는 추상적인 영역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내가 불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와 버린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적어도 불안에 관해서 나는 전혀 주도권이 없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다. 사람이 자신의 모든 것을 통제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떤 느낌, 어떤 감각은 이미 내 신체에 도착해있고 나는 그것을 겨우 알아차릴 뿐이라는 것을. 그것의 정체가 불안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도 많은 것을 지불해야 했다. '마음의 병'이라는 표현이 외국에서도 통용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끔 이 표현이 거의 모든 문제를 일으켰다는 생각을 한다. '마음'은 정말이지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영역인데다가 마치 자기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인상을 준다.
불안장애는 (여전히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 질환이긴 하지만)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메뉴얼이라고 불리는 DSM에 실린 심리적 병리상태로서, 치료의 대상이다. 불안한 이들은 극도로 높아진 불안민감성 때문에 괴로움을 겪으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다. 불안이 만들어진 질병이라는 시선, 거대 제약사들과 업계의 산업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현대적 질병이라는 주장에는 일견 타당성이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을 무언가를 숨기고 무언가를 과시하는 사람들로 봐도 괜찮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어떤 질병에 대해서도 환자의 의지나 태도 등을 문제 삼지 않는다. 불안장애가 병명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암, 심장질환, 당뇨, 고혈압 등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이들과 똑같이 대하면 그 뿐이다. 다른 신체적 질병과 마찬가지로 불안을 오로지 질병으로 대하는 것. '의지', '노력', '동기'와 연관시키지 않는 것.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하여튼 뭔가 좀 특이한 사람들이며, 피곤하게 꼬아서 생각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그런 길을 가길 원하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것. 일단 거기서부터 시작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