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마십시오.
사람들에게는 모두 방어기제가 있다. 자아손상감을 최소화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그 방식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기본적으로 내가 자주 쓰는 방어기제는 '신포도 전략'으로 <여우와 신포도>이야기에서처럼 포도를 따기 위해 이러저런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한 후에 여우가 "저건 어차피 신포도야."라면서 자신의 실패를 합리화하며 스스로를 위안하는 방식이다. 합리화(rationalization)는 빈약한 성과나 실패와 같이 불쾌한 상황을 그럴듯한 이유로 정당화함으로써 불안을 회피하는 방어기제다. (권석만,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 학지사, 67쪽)
그런데 불안진단을 받은 후 내가 취한 방어전략은 조금 달랐는데 그것은 바로 지성화였다. 지성화(intellectualization)는 정서적인 주제를 이성적인 주제로 전환하여 추상화함으로써 불안을 회피하는 것이다. 너무 고통스럽거나 위협적인 정서적 문제를 회피하기 위하여 분석, 추론, 사고 등의 이성적인 지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지성화는 분노에 대한 감정 통제에서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해소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누적될 수 있고 자신의 문제와 대면하지 않게 되는 문제를 만든다.
그리고 나의 지성화 작업은 책 읽기였다! 바로 불안에 대한 책읽기! 일단 나는 불안장애 진단 초기에 내가 정말 불안장애가 맞는지 반신반의했다. 왜냐하면 내 불안은 굉장히 비정형적이었기 때문이다. 범불안장애라서인지 늘 같은 조건에서 불안이 반복되는 패턴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괜찮고 어떤 날은 또 안 괜찮고, 어떤 날은 극장이 문제고 어떤 날은 프레젠테이션이 문제고. 나 조차도 종잡을 수가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자극이 나로 하여금 불안을 촉발시키는지 예측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리고 이것은 곧 대비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에 이어질 글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특정 조건 하에서나 특정 자극에 의해서만 불안이 촉발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불안도 있다. 비정형성은 범불안장애의 대표적인 특징이며 부동 불안(free-floating anxiety)이라고도 하는데 특정한 대상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대상에 옮겨다니는 불안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범불안장애는 순수한 신경증적 불안이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고.) 그리고 그것이 나를 정말로 불안하게 했다! (보라, 이것이 바로 불안장애 환자의 불안 메커니즘이다!) 그러다보니 불안에 대한 이것저것을 닥치는대로 찾아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나는 별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면 일단 개론서(?)를 한 권 사서 훑어보는 습관대로였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치료중인 환자나 내담자가 자신의 병증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글을 읽는 것은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어떤 병이든 환우들이 모여 투병생활에 있어서의 팁을 나누고 병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유독 정신병리에 관해서는 아파본 사람, 진단 받아본 사람들이 자신의 병에 대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나서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도 당연하게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 자신의 치료(특히 병이 호전되었을 경우에는 더더욱)를 승리의 경험이자 자신이 얻은 삶의 지혜라고 생각하게 되는지는 나 역시 유경험자로서 모르는 것 아니지만 여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감기에 걸렸다가 나아졌다고 해서 감기라는 질병의 정체와 기전에 대해서 다 아는 것이 아니듯이 우울도 불안도 마찬가지인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흐른다. 아마도 정신과든 상담센터든 정신병리의 경우 내담 자체가 내담자가 자신의 기분이나 상태, 증상이 발현되는 조건이나 계기, 신체화 증상 등을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을수록 치료자와 얘기할 때 더욱 편안하고 기본적으로 환자도 그것을 알려는/자각하려는 노력을 해야할 필요가 있는 질환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특성상 거기에는 주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어찌됐든 우울하다, 불안하다, 초조하다, 죽고싶다, 화가 난다 등을 느끼는 것은 환자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나의 주관적 감정에 책이나 논문 등에서 찾은 지식들을 레퍼런스로 붙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치료 중에 자신의 질환과 관련된 책들을 읽는 것은 자칫하면 '나만큼 내 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믿게 만들며 자신의 병에 대해 오해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불안에 대한 내 의구심을 책으로 채워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불안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와 나의 불안장애를 분리시키려고 했던 것 같다. 나의 불안이 아닌 불안이라는 질병을 객관적으로 다룬 글들을 읽으며 논리적으로 혹은 지적으로 접근한다는 핑계를 대며 정작 나의 고통의 근원인 내 불안은 회피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불안에 대해 내가 너무 아는 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을 잘 이해하기 힘들었고 나는 불안의 언어를 배우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핑계를 늘어놓다가 선생님께 지나치게 비유를 쓰지 말라고 또 한 번 혼나게 되었는데...그것이 정말 너무나 맞는 말이라서 나는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되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덧붙였다. 한아씨, 한아씨는 환자지 의사가 아니에요. 기억하세요. 나는 그 말에 양 볼이 데인 것처럼 뜨거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나의 상태 뿐이라는 것, 그것도 그렇게까지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것. 나는 어쩌면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는 되도록 먼 세계로, 다른 사람들의 불안이 열거되어 있는 책으로, 일반적인 불안을 이야기하는 세계로 도망쳤던 것이 아닐까?
어쨌든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불안에 대한 책을 더 이상 읽지 않을 것을 처방받았고 그것이 정작 내 불안을 회피하는 행동이자 방치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급격히 흥미를 잃어 자연스레 불안에 대한 책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심리나 정신병리에 대해 다룬 책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캐럴라인 냅의 <드링킹>이라든가 아래에서 소개할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같은 책은 몇 년 간 읽은 논픽션 중에 최고의 책이었으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나 어빈 얄롬의 <매일 조금 더 가까이>, 트라우마의 현대적 고전으로 불리는 <몸은 기억한다>,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트라우마> 등 조금 더 전문적인 심리서들이 여전히 가장 가까운 책꽂이에 꽂혀 있다. 나는 이 책들을 가끔씩 펼쳐보곤 한다. 북마크가 되어 있는 페이지들에는 내가 정말 아끼는 문장들이 있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내 병과 책에서 읽은 이야기들을 연관짓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한창 책으로 도망치던 시기에는 세상에 나잖아! 이것도 나잖아! 내가 이래서 이랬네! 저래서 저랬네! 하며 내 나름대로 내 병의 기전을 만들곤 했다. (당연하게도 이것은 거의 맞지 않았다. 선생님의 말씀대로다. 나는 환자이지 의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불안이나 긴장이 높다고 느껴질 때는 그런 책을 부러 찾아 읽지 않는다. 책을 읽는 것이 일종의 ‘도피’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후 1년 반 정도 치료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내가 나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른다는 사실을 새로이 알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에 대해 정말 빠삭하게 안다고 자신했었다. 특히 나의 심리상태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내가 준 전문가가 되었다고 여겼다. 십 여년동안 거의 매주 상담사를 만나 내 이야기를 하고 나의 상태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얻은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불안하다는 사실을 꽤 오랫동안 눈치채지 못했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저 나라고 생각해온 어떤 것이 방어기제의 일종이며 나의 무의식이 나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지속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것이 내가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정말이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보다 잘 모른다.
이것이 내가 좋은 것 속에는 나쁜 것이, 나쁜 것 속에는 좋은 것이 있다는 말을 정말로 믿게 된 경위다. 너무 진부해서 누가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왜 저렇게 하나마나하는 말을 할까 탈무드인가 싶을 정도로 따분만 말이지만 그 문장은 정말로 나의 잠언이 되었다. 나는 불안장애를 겪으며 나에 대해 훨씬 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었다. 나를 한 발짝 떨어져서 가만히 지켜보는 훈련을 하게 되었다. 나에 대한 선입견을 걷어내게 되었다. 그리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불안장애 진단을 받은 것은 물론 나쁜 일이었지만 이건 확실히 좋은 일이었다고.
'불안'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을 때 참고하면 좋을 책들을 몇 가지 가져와봤다. 치료 중에는 읽지 않는 편이, 책을 통해 얻게된 단편적인 지식과 내 증세를 견주어 보지 않는 것이, 내 불안을 해석하는 레퍼런스로 사용하지 않는 쪽이 좋다고, 아직도 생각한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브런치에서도 긴 글로 소개했던 책이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아주 다양한 불안을 겪으며 다양한 치료법을 경험해온 저자가 쓴 논픽션 에세이다. 생생한 불안 에피소드들을 보다보면 불안 장애 환자의 심리가 어떻게 흐르는 것인지 알 수 있다. 또한, 불안의 기전, 유전, 약물 등에 대해서도 꼼꼼히 다루기 때문에 불안에 대해 딱 한 권만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을 추천한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63822183
불안의 개념 / 죽음에 이르는 병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불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실존주의에서 불안은 자유를 누리는 인간이 갖게 되는 실존적 조건이다. 특히 키에르케고르는 평생 불안에 시달린 철학자로서 불안을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성, 자유와 필연 등 인간과 인간의 생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가지 모순적 요소 때문에 발생한다고 해석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975570
불안
신경과학자 조지프 르두가 불안과 공포를 뇌과학으로 설명한 책이다. 조지프 르두는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를 하는데 불안이라는 정서가 선천적인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인지적으로 만들어가는 경험이라고 본다. 르두는 지금까지 나온 불안에 대한 연구결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이 결과들이 대부분 동물실험의 결과로 인해 만들어진 사실에 특히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 불안과 공포의 메커니즘은 인간 뇌의 특징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안과 공포가 뇌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단락들이 흥미롭다. 하지만 조금 어려운 편이고 뒷부분은 조금 난삽한 느낌도 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8069604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치유를 위해 마련된 공간인 '이웃'의 정혜신 박사와 진은영 시인의 대담집. 사회적 트라우마와 PTSD에 대한 기본서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는 책이다. PTSD는 생명이나 신체를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후 겪는 질병으로 보통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를 동반하며 DSM-4까지는 불안장애의 한 종류로 분류되기도 했다.(DSM-5부터는 따로 범주화되어 나갔다.) PTSD에 대한 학문적 개념보다 구체적인 사건과 맥락 속에서 PTSD의 특성을 파악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6068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