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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현 Sep 11. 2020

대만의 평범한 골목

여행하며 그리는 삶

대만 특유의 날씨에 익숙해지고 있던 5일 차 아침.

짐을 아무리 줄여도 무겁게 느껴지는 여행용 가방 속에 우산을 챙겨 넣고 나서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도 대수롭지 않았고 흐린 날씨는 이제 익숙했다. 가보고 싶은 곳들은 어느 정도 가봤기에 굳이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나기로 한다. 어느 정도 정해놓은 반경 속에서 눈을 감고 지도를 터치해서 근처로 이동했다. 처음엔 신기했지만 갈수록 익숙해져 가는 대만의 평범한 풍경들. 정처 없이 걷다가 한 골목을 발견했다. 빨간 대문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골목. 이제껏 봐왔던 대만의 골목들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대충 마음에 들었다. 바닥에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풍경을 담기 시작한다.


스케치가 끝나고 채색을 시작할 즈음에 빨간 대문 옆의 옆집에서 한 사람이 나와서 '여기를 왜 그리는 거지?'라는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굉장히 익숙한 시선이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많이 물어보기도 하고 관심을 가져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디자인 전공을 했고, 현재는 집에서 공방을 하며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마 평범한 골목인, 본인이 사는 동네를 낯선 외국인이 와서 그림을 그리니 꽤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채색을 하는 동안 가만히 생각해본다.
나에게는 특별한 여행지가 누군가에게는 아주 평범한 일상이겠구나.
여행지와 일상은 참 한 끗 차이인 것 같다.


한동안 명동에 살았던 적이 있다. 명동에 살았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명동에 집이 있어?"라고 묻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세하게 얘기해주면 진짜 사람 사는 집이 있다는 사실에 금세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

명동에 살면서 일했던 곳은 집에서 나올 때 멜론 어플을 켜면 3곡을 채 듣기 전에 도착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명동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출퇴근을 했었고, 회식이라도 하는 날에는 텅 비어있는 명동 골목을 통째로 전세를 낸듯한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별거 아닌 텅 빈 거리에 사람들은 엄청나게 열광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평범한 일상 속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약속을 하고 굳이 찾아와야 하는, 혹은 멀리서 비행기 타고 찾아와 관광하는 명소기도 했다.


여행이란 단어가 사치가 되어버린 요즘, 여행지와 일상의 경계가 사실상 많이 무너지고 있다.

집콕만 하다가 잠깐 바람 쐬러 나가는 것도 여행처럼 느껴지니 말이다.

어쩌면 마스크 없이 마음껏 돌아다녔던 대만 여행이 내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평범했던 대만의 한 골목, 다시 한번 그려보며 추억해본다.




타이베이. 2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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