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우 Apr 12. 2019

우유니

“눈 안 부시세요?” 선글라스도 쓰지 않고 한낮의 우유니를 바라보던 지원에게 투어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는 지원을 보고서 선글라스를 살짝 내려 코끝에 걸쳤다가 이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쓰고는 말했다. “선글라스를 안 쓰시니까 눈물이 나는 거예요. 저도 눈이 다 시큰거리네요.” 그 말에야 지원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원이 우유니를 알게 된 건 연수 때문이었다. 스물다섯에 만나 다섯 해 넘게 서로 사랑했고, 남은 젊음과 그 뒤에 따라올 중년과 노년의 시간까지 함께하리라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 자그맣고 여린 어깨에 제 키보다 큰 삶의 무게를 짊어졌지만 그걸 이유로 자신을 좀 먹이지 않던 사람. 녹록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짬이 생기면 언제나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던 사람. 이따금 우울한 날이면 세계지도를 꺼내 이곳에 가고 싶다, 저곳에 가고 싶다고 웃으며 마음을 추스르던 사람. 


지원이 연수와 평생 함께하고 싶다고 마음먹은 그날도 그랬다. 무슨 일 때문인지 잔뜩 풀이 죽은 연수는 잡지에서 오려 내 줄곧 간직하고 있던 우유니 사진을 꺼냈다. “볼리비아에 있는 우유니 소금사막이야. 우기에 이곳을 가면 사막에 고인 물에 하늘이 그대로 비쳐서 하늘과 땅이 꼭 거울 같대. 언젠가 결혼을 한다면 우유니에서 하고 싶어. 하늘과 땅이 데칼코마니 같은 이곳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사랑하는 사람 손을 잡고 서 있으면 아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겠지.” 그러면서 연수는 마치 그 순간 우유니에 있기라도 하다는 듯 황홀한 표정으로 웃었다. 연수가 환하게 웃을 때는 오른쪽 볼 위로 인디언 보조개가 생겼다. 그때 지원은 평생 연수의 볼에서 그 보조개가 사라지지 않게 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6년, 지원은 우유니에 섰지만 곁에 연수는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연수가 지원과 함께 우유니에 설 일은 없을 것이다. 연수는 지난달 우유니가 아닌 서울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고 다른 남자 손을 잡은 채 오른쪽 볼에 인디언 보조개를 띠며 웃었으니까.


연수가 서글픈 눈빛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그래서 더 이상 지원과 함께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지원은 애써 그 눈빛을 피하며 말했다. “그 사람, 돈 많아?”

그 공허한 말을 내뱉는 순간 지원은 스스로를 마구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연수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세상 누구보다 지원이 가장 잘 알았으니까. 그저 둘 사이를 메운 5년이라는 시간이 지원에게는 연수와 평생을 함께할 뿌리가 되었지만 연수에게는 틔우지 못하고 시든 싹이었을 뿐, 그 사이 젊은 연수의 마음에 다른 사람이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겨울 노을처럼 이르게 슬픔으로 젖어드는 연수의 눈빛을 바라보며 지원은 자신들이 아직도 젊다는 사실이 마냥 서러워졌다. 


연수와 지원이 헤어지고서 세 번째 봄이 다가올 무렵, 선우가 지원에게 청첩장 한 장을 내밀었다. 청첩장에는 오른쪽 볼에 인디언 보조개가 팬 여자가 마주선 남자를 바라보며 해사하게 웃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연수는 잘 지내. 그러니까 너도 연수는 그만 좀 잊어라.” 굳이 선우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진을 보는 순간 지원은 깨달았다. 평생 곁에서 지켜 주고 싶었던 이 미소가 다시 지원에게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는 걸, 이제는 정말 자신의 젊고 오래된 마음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지원은 연수가 고이 간직했던 우유니 사진을 바람막이 안쪽 주머니에서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당연하게도 실제로 바라보는 우유니 사막은 아트지에 인쇄된 4도짜리 이미지와는 달랐다. 티끌 없이 새파란 하늘도, 천공의 성처럼 떠 있는 새하얀 구름도 한 치 굴곡 없이 그대로 물 찬 땅에 내려앉았다. 연수 말처럼 하늘과 땅이 데칼코마니 같은 이곳이 현실 세계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이 비현실적인 풍경 앞에 서서야 비로소 지원은 깨달았다. 지금보다 젊었던 연수가 그토록 이곳에 오고 싶어 했던 이유를. 늘 맑았고, 조금 흐려지더라도 이내 다시 활짝 갠다고 생각했던 연수는 사실 제 나이보다 늙은 삶을 짊어져야 하는 현실에서 무척이고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그리고 그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자신의 사랑이 너무나 어렸음을. 


가슴 아래 저 깊은 곳에서 샘솟은 뜨거운 무언가가 아프고 묵직하게 목을 지나 눈시울까지 차올랐다. 지원은 손바닥만 한 빛바랜 4도짜리 사진을, 그러니까 슬프도록 씩씩하고 아름다웠던 젊은 연수를 손에 꼭 쥐고서 눈앞이 흐려지는 줄도 모른 채 한참이고, 한참이고 우유니를 바라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능소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