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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r 27. 2022

행운을 빌어요

(22.3.27) 사피엔스,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ESG

 

 아침에 일어나면 정수기의 물을 한잔 마시고 스트레칭을 시작하고 섀도복싱을 한다. 주로 수면 잠옷을 입고 잠이 덜 깬 상태이므로 달콤한 인생의 이병헌 느낌은 아니고, 아니 사실 슈트를 입고 멀쩡한 정신이어도 이병헌 느낌은 아니지만... 어쨌든 섀도복싱을 한다. 섀도복싱은 제대로 할 줄만 안다면 가볍게 몸을 풀기에 아주 좋은 운동이다. 섀도복싱을 하고 있으면 자이언트 랙돌 고양이 하릅이 나에게 다가와 물어본다. 그건 왜 하는 거야? 누구 때릴 거야? 직접 때리는 것은 불법이지만 주로 가상의 상대를 정해놓기는 하는데 그것은 주로 같은 사무실에서 자주 보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의 경우 육체적 힘과 사회적 권력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이집트 파라오나 가톨릭 교황이 권투시합으로 선출된 일은 없다. 조직범죄단의 두목을 반드시 가장 강한 사람이 맡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구절을 보고 굉장히 큰 (유발 하라리가 절대 의도치 않은) 깨달음을 얻었으며, 최근 회사의 상임이사 내부공모와 지원자 4인을 보고는 차라리 화끈하게 UFC룰로 옥타곤에서 대결하여 선정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끔은 어른들의 성공 스토리가 납득이 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에 물리적인 실체(챔피언 벨트라던지)라도 보면 조금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임원이 되기까지 하루에 2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는 분도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아는 이성적 상식으로는 하루 2시간 수면이면 1년 안에 죽을 수도 있다. 차라리 축지법을 쓰시거나 장풍을 쏘신다고 하셨으면 고개나 끄덕여 드렸을 텐데.

  나는 그 이후로 모든 그럴듯한 인물들의 바이오 그라피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우주는 빅칠(Big Chill)로 인한 팽창 중인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는 성찰을 얻었다. 플로리안 아이그너의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에는 ‘생존자 편향’이라는 현상을 설명해 주는데, 성공한 사람들의 경험과 동일한 경험을 가진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그중에 성공한 사람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운과 성공은 그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덧붙인다.      


  어쨌든 말로만 ESG 경영 어쩌고 할 것이 아니라, 수평적 거버넌스를 위해서 사원부터 큰 어르신까지 직급을 떼고 대통합 글러브를 쥐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물론 그날을 위해 아침마다 준비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아니다.

  2020년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 이후에 ESG 경영이 쿵쿵 따리 유행가의 영어 랩처럼 여기저기 불려대고 있다. 유행가 영어 랩의 특징은 모두가 따라 부르지만 아무도 의미는 모르며 그 의미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점이다. 얼마 전 사무실에서는 ESG가치 인식 내재화를 목표로 빅워크라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10만보를 걸으면 그 걸음 수만큼 나무를 심고, 사회가치 점수를 주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 나무를 심는 재원을 전사적으로(반 강제적으로) 모은 기금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이미 기금을 위해 돈을 기부했는데, 뭐하러 10만 보는 걷느냐는 유의미하고 건설적인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나무는 그냥 심으면 안 되나? 아니면 직원들의 걸음 수만큼 높으신 어르신들이 사회 취약계층에게 연탄이라도 하나씩 돌리시든지 하는 것이 더 훌륭하고 아름다운 인과라고 홀로 섀도복싱해본다.     


  사회가치 점수라는 것은 일종의 학창 시절의 봉사 점수 같은 것인데, 우리는 전사적으로(반 강제적으로) 여러 가지 사회 봉사 활동을 통해 그 점수를 채우고 있다. 아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다. 일을 줄여줄 것 아니면 그냥 봉사 전용 부서를 만들어서 봉사만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걸음도 걷고 나무도 심고 봉사도 하고 인형 눈도 끼우면서.

  얼마 전 사무실로 공문이 도착했다. 어느 지역의 재해를 위한 기부를 하면 사회가치 점수 1점을 준다는 것이었다.(원하는 금액을 적어내면 급여에서 공제해서 회사이름으로 총액을 기부하는 방식이다.) 얼마를 내던 겨우 1점이라고요? 나는 담당자에게 되묻고는 스트레스를 받아 잠시 사무실 밖의 정원에 나가 92% 다크 초콜릿을 씹어 먹으며 잠시 앉아 있다가 리프레쉬가 끝난 이후, 777원을 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잊고 살고 있었는데 얼마 후, 저 멀리서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혹시 이거 잘못 적으신 건가요? 제가 자료를 전체 취합하고 있는데 숫자가 좀 이상해서. 그녀는 울먹이듯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이별을 통보하는 나쁜 남자처럼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말했다. 아니요. 777원 맞습니다. 그거 저 맞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숫자입니다. 쓰리 세븐. 행운을 빕니다. 다만 교만은 조심하시고. 애니웨이, 굿럭.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달콤한 인생 (김지운)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 (플로리안 아이그너)

유행가 (송대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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