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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r 12. 2022

밤에 서울에서 혼자

(22.3.11) 밤의 해변에서 혼자, 바퀴 달린 입, 마르크 오제

illustrated by 닿

  해가 뜨기도 전이었다. 나는 서울로 가는 SRT를 타기 위해 일찍 나왔다. 늘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자이언트 랙돌 고양이 하릅도 깨어나기 전이었다. 하릅은 부산스러운 거실 분위기에 눈을 뜨고 하품을 길게 하더니 몸을 둥글게 말고 다시 잠이 들었다.

  기차 안은 마르크 오제가 말한 전형적인 비장소(non-place)이며 고독의 공간이다. 더 나아가 제이 데이비드 볼터와 리처드 그루신은 이러한 비장소를 “미디어 침투 공간”으로 명명하였으며 공간성이라는 측면에서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모바일 미디어를 통해 ‘가상적으로’ 실재하는 나만의 장소로 전유하게 된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기차 안이든 비행기 안이든 나에게 정해진 자리에 앉았을 때, 블루투스를 켜서 음악 듣고 책을 펼치다가 잠이 오면 잠시 졸다가 유튜브를 보기도 하며, 약간의 설렘과 들뜸을 느낀다.  

  유튜브를 열어서 스튜디오 와플의 고품격 토론회 ‘바퀴 달린 입’을 재생했다. 주제는, 전 애인과 친구가 가능한지, 클럽에서 만난 애인과 결혼 가능한지 같은 것들이었다. 결론이 뭐가 중요한가? 이들이 아무 말이나 떠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근심과 걱정이 스르르 사라진다. 피어싱 한 여자랑 키스해 봤어요? 왜 제가 해 봤을 거라고 생각해요? 아니 그럼 지금 해 봐. (효과음. 깔깔 마녀의 웃음소리) 뭐 이런 식이다.

  나는 요즘 금요일 자정처럼 고요하고 느긋하고 가만한 시간이 오면 혼술을 하며 홍상수 영화를 볼지, 대선 토론을 볼지, 바퀴 달린 입을 볼지(혹은 터키즈?)를 볼지 고민하곤 했다. (선거가 끝나니 무한도전이 종영할 때의 기분이다.)

  내가 어린 시절 좋아하던 모임 중의 하나는 멍청한 남자 사람들이 모여서 당의즉답증처럼 말도 안 되는 말을 끝없이 시시덕거리는 자리였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누군가의 입에서 유식하거나 철학적이거나 정곡을 찌르거나 진지하거나 감성적인 화두가 발사되어 나오기만 하면 정교한 깐족 지대공 미사일로 격추하여 웃음거리로 만들기 바빴다. 진지한 허세는 우리의 먹잇감이었다. 우리는 모두 진지하지 않으려 철저하게 애쓰며 하루 종일 배를 잡고 웃다가 집으로 왔다. 대선 토론과 바퀴 달린 입에서는 그러한 종류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해 준다.

  그렇다면 홍상수 영화는 왜 이들과 엮이는 거냐고? 홍상수의 영화는 우리의 모임에서 공격 대상이 되곤 했던 바로 그 진지한 허세의 완벽한 환유이다. 진지한 척, 책 많이 읽은 척, 남들과 다른 척, 쿨한 척, 우울한 척, 예술가인 척. 격추 미사일 한 방이면 깔깔이가 무지개처럼 쏟아지는 완벽한 먹잇감이다. 홍상수야말로 ‘바퀴 달린 입’의 패널로 나와야 한다. 내 여자 친구가 내 친구의 깻잎을 떼어줘도 괜찮은가? 술자리에서 내 여자 친구와 내 친구 단둘이 담배 타임 가능한가? 어떠한 논쟁적인 질문 앞에서 홍상수야말로 준비된 대답이 가능할 것이고, 그 자리의 홍상수는 물론, 소주를 적어도 3병은 먹은 채이어야 한다. 그의 침중하고 교교한 답변이 시작되면 끝나기도 전에, 바퀴입의 작가인 깔깔 마녀의 웃음소리가 빡 꽂히며 이용진이 깐죽거리며 얘기할 것이다. 와 진짜 꼴리는 데로 하면서도 체계가 있으시군요! 나도 이 따위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풍자는 묻겠지. 오빠 자꾸 나를 왜 그렇게 쳐다봐요? 나한테 관심 있죠? 나랑 지금 아이코스 타임 한 번 가질래요? 우여곡절 끝에 홍상수는 7만 원의 출연료를 모아 다시 김민희와 아트 영화를 찍고 베를린으로 가는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민트 소주에 만취가 된 채로 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봤는데 내용은 이렇다. 여배우인 영희(배우 김민희)는 유부남 영화감독(배우 문성근)과 사랑에 빠지고 이에 대한 스트레스로 외국의 어느 도시로 갔다가 강릉으로 돌아오고 우연히 그 감독(홍상수 아니, 문성근)을 만나게 된다.

  이 영화는 2017년 제67회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올라가게 되고 김민희는 한국인 최초로 은곰상(여자연기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리고 2018년 카예 뒤 시네마 선정 올해의 영화 7위에 선정된다. 본인이 본인 얘기에서 본인을 연기하고 연기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말은 그럴듯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조폭 두목 조양은은 1995년 자서전 ‘어둠 속에 솟구치는 불빛’을 내놓고 그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보스’에서 직접 본인을 연기했지만......(항마력 고렙 용자들은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메이킹 필름까지!)

  ‘밤의 해변에서 혼자’의 하이라이트는 강릉에서 그 유부남 영화감독(하필 문성근이 연기한다.)을 만나 술자리를 하게 되고, 갑자기 김민희에게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 일부를 거의 오열하는 감정으로 낭독해 주는 장면이다.      

  저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심장이 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제야 우리의 사랑을 방해한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불필요하고 사소하고 기만적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악마를 보았다의 최민식의 명대사 “야, 씨X, 내가 너 좋아하면 안 되냐?”와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솔직하고 시적이며 힙하고 쿨한 대사일까? 어려운 문제다.

  나는 영화를 본 다음 날, 하릅을 앞에 두고 홍상수를 연기한 문성근을 흉내 내며 똑같이 읽어 보았다. (사실 읽다가 항마력이 딸려서 몇 번이나 실패했다.) 하릅은 졸린 듯이 실눈을 뜨고 나를 지긋이 보다가 갑자기 화가 난 울버린처럼 손톱을 뽑아서 내 얼굴을 할퀴었다. 도대체 고양이라는 족속을 알 수가 없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비장소(마르크 오제)

재매개(제이 데이비드 볼터, 리처드 그루신)

밤의 해변에서 혼자(홍상수)

바퀴 달린 입(스튜디오 와플)

보스(유영진)

악마를 보았다(김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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