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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Feb 26. 2022

살찐 고양이의 사랑법

(22.2.26) 파트리크 쥐스킨트, 살찐 고양이법, 대선 토론

 


  택배가 도착했다. 웡시로 부부가 나의 서프라이즈 생일선물로 보내준 빵과 원두였다. 웡시로 부부는 서울에서 베이커리 카페를 하고 있다. 웡은 빵을 굽고, 시로 님은 커피를 만든다. 그리고 진간장처럼 검은 푸들을 키운다. 이 부부는 나라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파격적인 것들을 어렵지 않게 실행하고 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너무도 잘하고 있다. 멋지고 아늑한 베이커리 카페, 손목에는 훈장 같은 크로와상 타투, 남들보다 빠른 시기의 결혼.(이것은 빼도록 하자.)

  나도 언젠간 타투를 새겨보고 싶지만, 막상 무엇을 새겨야 후회하지 않을지 잘 모르겠다. 르네 마그리트를 오마주 하여 ‘이것은 타투가 아니다’라는 레터링을 새기는 것은 어떨까? 6개월만 지나도 후회할 것 같다. 6개월짜리 유효기간 타투를 새길 바에 네이버 QR코드를 이마에 박는 게 낫지.

  언젠가 회사를 그만두고 칸트처럼  본격적인 프로 산책러 겸 집착적인 커피 애호가가 될 생각은 늘 하고 있다. 24시간 커피를 끓이고 있는 하인은 없지만 2분 만에 입안에 털어 넣을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는 누구나 손 닿는 곳에 있지 않나. 하지만 물론 그것도 생각만 할 뿐이다. 죽기 전까지 생각만 할 예정이다. 생각만이 이 국가에서 나에게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다.    

  어떻게 내가 회사를 다니고 있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있는지 나 자신도 모르겠다. 얼마나 취업에 관심이 없었냐면 우리나라에 회사가 그렇게 많고 직종도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을 4학년 2학기나 되어서야 알았다. 나는 화공학과를 졸업했는데, 졸업하면 향수나 만드는 줄 알았다. 교양 시간 과제로 나는 실제로 가상의 입사지원서 및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지원 회사는 향수회사였다. 아마 마침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향수회사 면접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때문에 향수에 관심을 가졌다고 대답한다면 면접관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자기들 회사 조향 연구실에 시체라도 발견되면 큰일이니까.  

  정신 차리고 입사지원서를 이곳저곳에 넣게 된  것은 순전히 주변 사람들의 성화와 압력 덕분이었다. (입사지원서에 토익점수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하지만 내가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시절 원 없이 산책을 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졸업하고 4개월 정도 후에 취업을 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별것도 없는 집 뒤를 어슬렁거렸다. 그때의 행복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엄마는 늘 옆집, 윗집, 아랫집 아들들의 취업 소식을 나에게 전하며 부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말했지만 나는 나 대로 행복했다. (그런데 결국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애들도 별거 없더라.)  

  결국 취업이 되었고 그마저도 나는 6개월 정도만 다니다가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 후회가 되느냐고 물으면 그렇지는 않다. 늘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요기보 빈백에 누워서 넷플릭스와 왓챠와 티빙과 웨이브와 유튜브 프리미엄과 디즈니 플러스를 마음껏 골라 보며 배스킨라빈스 31의 트리플 민초 레디팩  한 통을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까서 먹을 수 있을 때 나는 나름의 만족감을 느낀다. (다행히도 하릅은 민트를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에 나의 민트를 온전히 먹을 수 있다.) 치약 맛이 나서 너무 싫다는 지인들을 볼 때마다 나는 굉장히 의아한 기분이 든다. 나는 어릴 때 종종 치약을 먹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약을 먹지 않아도 치약 맛이 난다면 굉장히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나는 웡이 보내 준 빵을 차곡차곡 정리했고 그 와중에 라텍스 매트리스와 한 몸이 되어 누워있던 하릅이 득달같이 달려와 소시지빵을 낚아챘다. 선택적 스피드 고양이 같으니. 하릅은 소시지빵을 제일 좋아했고, 그중에서 최고는 웡이 만든 소시지빵이었다. 이 소시지는 내가 그동안 먹어왔던 소시지와는 달라. 소시지를 감싸고 있는 빵은 또 어떻고. 페스츄리처럼 너무 바삭하지도 않고 보통의 빵처럼 눅눅하거나 질기지도 않아. 이 버터향은 또 어쩔 거야. 미쳤어. 미쳤다고. 그렇게 묻지도 않은 독백을 쏟아내면서 와구와구 두 개나 먹고는 다시 뒤뚱뒤뚱 매트리스로 돌아갔다. 너 요즘 살찐 거 같아. 그거 알아? 내가 말하자, 하릅은 손바닥을 날름 핥으며 안 그래도 다이어트 중이라고 답했다. 고양이식 조크인가? 어이가 없었다. 이번 대선은 누구 뽑을 거야? 내가 묻자, 하릅은 너무나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고양이가 무슨 선거권이 있어? 관심 없어.

  나는 어쨌거나 하릅에게 심상정을 추천했다. 왜냐고 물어보면 심상정의 공약 중에 ‘살찐 고양이법’이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악당처럼 낄낄 웃으려고 했으나, 하릅은 인간의 정치에는 통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인간의 유튜브는 왜 그렇게 보는 걸까? (요즘 히밥 유튜브는 왜 그렇게 보는데?) 나는 요즘 우울할 때 대선 후보 토론을 본다. 장르적으로 내가 피카레스크를 무척 좋아하기도 하고, 티키타카가 그렇게 잘 되는 캐릭터들은 김태호 PD의 예능 정도는 되어야 볼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들이 무한도전 식의 추격전에 나온다면 시청률 30%는 찍을 수 있다고 믿는다.

  시로 님이 보내 준 원두는 미국 브루클린에 위치한, 싱글 워시드 원두 전문 브랜드 SEY COFFEE의

‘Mapendo’라는 이름의 원두였다. 동봉된 원두 설명 카드를 읽어보니 스와힐리어로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램 당 20원짜리 원두만 먹다가 6배는 더 비싼 원두를 보니 어느 순간 줄곧 혼수상태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미각이 못내 송구스러워졌다. 콩고에서 재배되고 브루클린에서 패킹되어 한국에 도착해 시로 님에 의해 보내어진 ‘사랑’이라는 원두를 그라인더에 넣어 20그램을 갈고 하리오 드리퍼에 넣어 추출했다. 그것을 음미하며 생각했다. 이것은 무엇일까. 그린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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