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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r 20. 2022

조퇴의 기분

(22.3.20) 조퇴의 기분, 리카르도 보필, 테레사 프레이타스

  

  수개월 전부터 하릅이 집안 분위기 전환 겸 그림을 하나 그려서 걸어 두는 게 어떠냐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건성으로 대답하고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하릅이 어디선가 455 X 530 사이즈의 미술용 캔버스를 들고 와 내 책상에 얹어 두었다.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릅에게 물었다. 이거 어디서 훔친 건 아니지? 하릅은 그 말을 듣자, 고결한 랙돌의 도덕성을 모욕하지 말라며 힐긋거리고는 내가 숨겨 놓았던 건망고를 뜯어먹었다.

  나는 이왕 봄이 되었으니 테레사 프레이타스의 핑크핑크한 사진을 모티브로 하여 그리기로 하고 여러 가지 작품들 중에 ‘라 무라야 로하(la muralla roja)’의 사진을 골랐다. 라 무라야 로하는 건축가 리카르도 보필이 설계하여 1973년 스페인의 칼페에서 완공된 아파트로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의 미로 계단 세트의 모티브로 더 유명해진 곳이다. (그곳에는 언제쯤에야 재건축추진위원회 플래카드가 붙을까 궁금하다.)  

  나는 점심을 먹고 크리스탈 티의 ‘조퇴의 기분’을 들으며 대충 스케치를 했다. 듣고 있다 보면 ‘오후 반차의 기분’이 느껴진다. 북적이는 사무실을 떠나 텅 빈 도로를 달리는 기분. 그리고 나는 지금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리고 있으므로 나의 시간은 상대성 원리에 따라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보다 천천히 갈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 기분이다.

  아무래도 쨍한 색감을 표현하려면 아크릴 물감이 좋을 텐데 집에는 수채화 물감밖에 없었다. 나는 선을 몇 개 쓱쓱 그리고 하릅에게 아무래도 당이 떨어져서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둘러대고 캔버스를 치워두고 유튜브로 아크릴 물감 쓰는 법을 찾아서 봤다. 그러다가 ‘미노이의 요리조리’로 넘어가서 본격적으로 시청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미술 시간을 좋아한 기억이 없다. 부산스럽게 미술 재료를 준비하는 것부터 마음이 불안하고, 스케치북을 펼쳐 선생님이 말하는 대로 열심히 해보지만 조악한 결과물을 마주할 때는 피로가 몰려왔다.

  친구들은 토리야마 아키라의 만화 드래곤 볼, 닥터 슬럼프 등을 따라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돌려보며 품평을 했다. 그때도 나는 늘 재능 있는 친구들과 비교하면 발가락으로 그린 것 같은 나의 결과물을 보며 ‘재능’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닿은 타고난 천재 카투니스트이다. 그림의 재능이라는 것은 선 하나만 보고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면 반짝이는 재능에 대한 눈부심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부러움이 다시 희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문제는 본인이 카투니스트라는 것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동료들과 함께 조직했던 전방위적 글쓰기 조직 ‘사건의 현장’의 굿즈 제작을 위한 캐릭터를 만들어 달라고 종용하였는데, 닿은 선뜻 승낙 비슷한 것을 했던 것과는 반대로 거의 몇 달을 나를 피해 다녔다. 심지어 우연히 백화점에 갔다가 닿을 맞닥뜨렸으나, 닿은 나에게 말하길 본인은 닿이 맞으나, 평행우주에서 시간의 얽힘으로 불시착한 닿이며 얼른 이곳을 떠나 원래대로 돌아가야만 한다며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닿은 ‘사건의 현장’의 일기 쓰기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캐릭터를 너무너무 그리기 싫다는 내용의 일기를 써서 나에게 이메일로 보냈는데, 심술궂고 못생긴 내 얼굴과 불만에 가득 차 있는 닿이 책상에 앉아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있는 모습을 함께 그렸다. 나는 일기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그 그림을 보자마자 닿에게,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요시모토 나라이며 너는 당장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때려치우고 카투니스트의 세계로 입성해야 한다고 말하려 했으나 나의 전화가 차단되어 있어 구글 메일로, 통 연락이 안 되니 그냥 이 그림을 쓰겠다고 보내야만 했다.

  그러자 두문불출했던 닿으로부터 접선 요청이 왔으며 우리는 진주에 있는 문희정 커피가 문을 열자마자 새벽 공기를 뚫고 만났다. 닿은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 주위를 둘러보다 태블릿을 꺼내어 이왕 캐릭터로 쓸 거면 제대로 쓰라며, 마치 살바도르 달리가 츄파춥스 상표를 디자인하듯이 일필휘지로 캐릭터를 보완하여 완성해 주었다. 나는 그에게 얼마 전 평행우주에서 온 너를 봤다고 알려주었으나, 닿은 손가락을 세워 입에 대고는 그런 말은 이제 불필요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사무실로 들어가 어른들에게 보여줄 100페이지 보고서를 완성하고 뿌듯해했다.

  나는 우연히 그의 보고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보고서는 마치 웨스 앤더슨의 영화처럼 대칭적이며 구조적인 파스텔 톤의 구조물을 연상시켰다. 일찍이 르 코르뷔지에가 건축은 땅 위에 시를 짓는 일이라고 했던 것처럼, 닿은 보고서 위에 건축물을 올리고 자신의 예술적 구조물을 자신도 모르게 완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보고서 위에 스티커를 붙일 수 있었다면 스누피 스티커로 예술적 완결도를 더 높이고 싶었을 것이지만 어차피 어른들은 그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한다.


  리카르도 보필은 2022년 1월 14일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나는 그의 작품 중 1982년 파리에 지어진 아브락삭스 공동주택을 제일 좋아하는데 마치 로마의 콜로세움을 연상시키는 곳으로 중앙 광장에 앉아 있는 상상을 하는 것 만으로 벅차오른다.(그런데 보기와 다르게 치안이 좋지 않다고 한다.) 나는 2022년 한국의 리카르도 보필은 다 어디 가고 똑같은 성냥갑 아파트 밖에 없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마 사무실 어딘가에서 자정이 넘도록 100페이지 보고서를 쓰고 있겠지, 하고 브런치의 마지막을 쓰던 중 닿에게 카톡이 왔다.

  굽네치킨 시카고 피자 한번 시켜서 먹어봐. 진짜 맛있음. 굿굿.      


※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테레사 프레이타스 (https://www.teresacfreitas.com/)

리카르도 보필 (https://ricardobofill.com/)

오징어 게임 (넷플릭스)

미노이의 요리조리 (AOMG)

드래곤 볼, 닥터 슬럼프 (토리야마 아키라)

조퇴의 기분 (크리스탈 티)

시카고 피자 (굽네치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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