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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Apr 02. 2022

보르헤스와 나와 고양이

(22.4.2) 보르헤스, 픽션들, 보르헤스와 나

   

하릅의 일러스트 by 봄


  오늘은 헤어숍을 가기로 해서 무슨 책을 가져갈지 정해야 했다. 헤어숍은 책을 읽기에 너무 좋은 곳이다. 나만의 자리에 앉아서 두툼한 쿠션 위에 책을 올려놓고 즐거운 음악을 들으면서 읽을 수 있다.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다들 각자의 사무를 보느라 대화도 없어 집중하기가 좋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은 헤어숍을 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책의 후보는 일단 보르헤스로 시작했다. 최근에 나는 제이 파리니의 ‘보르헤스와 나’라는 책을 샀기 때문이다.

  작가가 젊은 시절 70대의 보르헤스와 함께했던 여행을 기초로 한 소설 형식의 회고록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 보르헤스의 단편집 ‘픽션들’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소설들은 짧았지만 도통 그 형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세상에 있지도 않은 책들을 태연하게 인용하면서 실존 인물을 뒤섞기도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고 조금 짜증이 났었던 것이다. 심지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보르헤스의 작품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애초에 그 망할 현관조차 찾기도 어려웠다.      

 

  어쨌든 ‘보르헤스와 나’를 읽기 위해 나는 어쩐지 보르헤스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하릅에게 나가는 길에 도서관에서 보르헤스 책을 빌려와 달라고 부탁했다. 보르헤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소재의 시립도서관에서 일하다가 그 유명한 ‘바벨의 도서관’을 집필했고 이후 아르헨티나의 국립 도서관장에 임명이 되기도 하였으니, 그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대여하는 것은 일종의 예우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회사를 마치고 집에 와 보니 기대했던 단편집인 ‘픽션들’은 없고 보르헤스의 ‘논픽션 전집’이 벽돌 탑처럼 쌓여 있었다. 하릅에게 이게 다 뭐냐고 했더니 보르헤스 작가로 검색된 작품들을 다 가져왔다고 했다. 이렇게 많은 작품이 국내에 번역된 줄도 몰랐는데, 알고 보니 민음사에서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야심 차게 진행한 국내 최초 보르헤스 논픽션 완역 프로젝트였다. 픽션들은? 픽션들은 없어? 내가 묻자 하릅은 요기보 빈백에 누워 웹소설 ‘희란국 연가’를 보며 픽션들이고 패션들이고 모르겠고 그거나 읽으라며 하악질을 했다. KFC 비스킷을 하나만 사 오라니까 에그타르트 한 박스를 사 온 주제에 하악질을 해대다니, 굉장히 무례한 저런 고양이가 왜 내 집에서 안 나가고 저러고 있는 거지? 황당했지만 일단 빌려온 거니 읽기로 했다. 책도 많고 시간도 많다. 그리고 약속은 없다.      


  ‘또 다른 심문들’은 철학과 문학에 관련된 에세이라고 하는데 첫 장에는 진시황에 대한 독특한 해석(장서를 불태우는 것과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것은 비밀리에 서로를 무효화하는 작용이다라는)으로 시작하지만 그 뒤에는 내가 잘 모르는 작가들이거나 작가나 작품 이름은 들어봤지만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어서 말 그대로 내가 심문을 당하는 심정으로 읽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보르헤스와 나’를 이번 생에서는 읽을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배어들고 있다. 내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새무얼 테일러 콜리지와 너대니얼 호손과 윌리엄 벡퍼드를 새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헤어숍을 가기 위해 나는 100년 동안 도서관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할지도 모른다.

   라고 하지만, 막상 나의 브런치 활동 계획은 몽테뉴적이면서도 보르헤스적인 에세이가 그 목적이라고 밝혔었다. 필요할 때는 그를 멘토처럼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나의 브런치 글들을 지인들에게 보여주자, 이것을 자기식으로 이해한 퐝은 자신을 이 브런치 글에 등장시킬 때는 백호로 묘사해 달라고 했다. (아무래도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식으로 이해를 한 것 같은데, 사실 그거랑 거리가 멀지만...) 그래서 퐝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문학에는 크게 관심이 없으며 일상에서는 모든 것을 제쳐두고 방역에 집중적으로 몰두하는 하얀 호랑이인데 언젠가 연말에 내가 심심하면 70매짜리 단편 소설이나 한번 써보라고 했더니, 이틀만에 뚝딱 100매를 채워와서 나를 기함시켰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태어나서 처음 써 본 소설이었는데 심지어 재미있었다. (제목이 '인생무상'이었다는 것도 놀라운 지점 중 하나였다.) 퐝이 나에게 자신의 소설에 대해 조언해 줄 것이 있냐고 했을 때, 나는 말년에 보르헤스가 젊은이들을 위한 조언을 요청받았을 때의 말을 인용하였다.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보르헤스와 나 (제이 파리니)

픽션들 (호르세 루이스 보르헤스)

또 다른 심문들 (호르세 루이스 보르헤스)

인생무상 (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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