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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Apr 10. 2022

하루키는 왕가위 리마스터링 시리즈를 보았을까

(22.4.10.) 하루키, 왕가위, 김의석

  


  자이언트 랙돌 고양이 하릅과 함께 서점에 갔다. 하릅이 좋아하는 베이커리 카페에 서점이 붙어 있기 때문에 종종 들르게 된다. 그곳에서 하릅이 빵을 잔뜩 고르며 집어먹는 동안 나는 ‘무라카미T’를 집어 들었다. 작년에 국내에 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으로 티셔츠에 대한 에세이집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을 챙겨 본 지는 오래되었지만, 패션 매거진 별책부록의 티셔츠 룩북처럼 한 컷 안에 잘 정돈된 티셔츠들을 보자 구매 욕구가 생겼다. 동시에 이쁜 티셔츠도 사고 싶어 져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타임의 ‘SAVE OUR SPECIES’ 멸종위기 동물 보호 캠페인으로 진행된 큰 코뿔새 프린트 티셔츠도 샀다. (마지막까지 개코원숭이 프린팅과 치열하게 경합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알게 된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내가 배치받았던 자대에는 도서관이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그 옆에도 케이크를 굽는 빵 공장이 붙어 있었다. 근처에는 테니스 코트와 헬스장이 있었으며 조금 더 떨어진 곳에는 극장도 있었는데 나는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를 치는 테니스병 삔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 삔은 대대장 사모님과 테니스를 치며 한 세트당 ‘나이스 샷!’을 200번쯤 외치는 임무를 통해 국가와 민족에 헌신하였으며, 전쟁 중에 총은 잃어버려도 테니스 라켓은 절대 사수해야 하는 중차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그 시절 여자보다 영화에 미쳐 있었고, 동시에 알코올보다 단당류에 굶주려 있었으므로 일주일에 한 번 상영하는 영화를 영접하기 위해 PX에 들러 과자와 음료수를 가득 들고서 극장으로 가곤 했다.(영화의 신이시여 흠향하소서.) PX에는 과자의 가격이 매일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는데, 선임들은 그 이유를(믿거나 말거나) 정산이 맞지 않는 금액을 메꾸려는 비열한 땡보 PX병들의 농간이라고 설명해 줬다. 이상하게도 우리 부대 PX병들은 유난히 뽀얗고 뚱뚱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저녁이 될 때까지 일대일 농구를 하고 테니스 코트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 우리 반드시 선댄스 영화제에서 만나자. 그리고는 선글라스를 쓰고 바로 칸 영화제로 가는 거야. 우리는 맹우가 되어 그런 이뤄지지도 않을 범박한 주문을 외우며 한 주를 마무리했다. 요즘엔 연락할 때 서로 이렇게 묻는다. 너 요즘도 영화‘같은 거’ 보냐?      


  시작은 도서관에 꽂혀 있던,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한국 작가의 책이었다.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 후에 상실의 시대를 읽었는데 그 내용이 너무 똑같았던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떠올려 봐도 그 한국 작가의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데 마침 같은 시기에 무라카미 하루키 표절 시비에 올랐던 작품들을 찾아냈다. 이인화의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내가 읽은 것이 아마 저 두 작품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할 뿐이다.

  1992년 같은 해에 위에 언급된 작품으로 이인화는 제1회 세계문학상, 박일문은 제16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사실 그 전에 1990년에 발표된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가 하루키의 모방이라는 지적을 받자, 장정일은 오히려 하루키의 표절작으로 박일문을 지적했고, 박일문은 급기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기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이인화는 평론가 이성욱에게 하루키의 표절이라고 지적받자 자신의 표절 시비에 대해 표절이 아닌 ‘혼성모방’이라는 반박을 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은 그런 지점이 분명히 있었다. 하루키는 한국 문단에게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로 표현되기도 했다. 조용호 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분명히 대부분이 그 하루키의 영향권 안에 있었으나 동시에 그들은 인정하지 않고 애써 하루키에 관심 없는 척했다. 심지어 논란의 당사자인 장정일마저 하루키를 ‘문학이라는 뷔페에 올라온 인스턴트식품’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다. (그럼 그들의 작품은 모두 ‘인스턴트에 대한 명상’이란 말인가...)     


  이와 비슷한 일이 영화계에도 있었다. 중경삼림과 타락천사가 개봉하고 마마스 앤 파파스의 ‘캘리포니아 드림’이 한국에서 역주행 히트를 치며, 타락천사를 패러디한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 당시 섹스 코미디로 잘 나갔던 김의석 감독은 ‘홀리데이인 서울’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무려 김민종, 장동건, 최진실, 진희경, 차승원, 이경영이 나오며 내용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중경삼림과 타락천사를 합친 것이라고 보면 되는데 내용뿐만 아니라 연출과 편집 등 너무 뻔뻔하게 대놓고 모방하고 있어 당황스러울 정도다. 시나리오를 읽은 장동건이 애초에 이에 대해 지적하자 이에 대한 김의석 감독의 변명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이미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는 한 장르가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모방이 아니라 같은 장르의 영화일 뿐이다. (그러나 영화 소개 정보에는 장르가 드라마라고 되어 있다. 장르를 중경삼림으로 수정해 주길 요청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 멋진 언변에 장동건은 설득당하여(!) 오히려 중경삼림을 의식하면서 아주 재미있게(?) 찍었다고 한다. 어쨌든 나는 최근에 이 영화를 보면서 최진실을 다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무라카미T,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아담이 눈뜰 때 (장정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인화)

살아남은 자의 슬픔 (박일문)

중경삼림, 타락천사 (왕가위)          

홀리데이인 서울 (김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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