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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Jun 06. 2022

너로 정했다!

(22.6.6.)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

  사무실에서 잠시의 여유시간에 나는 2020년 11월 1차전으로 발발되어 2021년 10월 4차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던 ‘물상대위권 VS 질권’ 전쟁 기록철을 꺼내어 읽었다. 전쟁의 발단은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읽기 시작했던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였다. 나는 10년 전에 금융연수원에서 ‘근저당권의 취득, 관리, 실행 실무’라는 2일짜리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나는 교육에는 관심이 없어 삼청동의 카페나 검색하며 앉아 있었고 마치고 나면 명동이든 신사동이든 어디든 가서 화려한 조명이 있는 곳에서 좌우 위아래로 흔들면서 밤을 보낼 생각밖에는 없었다.(Can you feel it?) 그 교육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받아서 돌아왔고 그것이 오시정 교수의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이다. 그러니까 나는 교육을 받은 지 10년쯤 후에나 진지하게 이 책을 읽어 봤던 것이다. 그리고 ‘물상대위권과 질권이 경합하는 경우의 우선순위’ 부분이 나왔을 때, 나는 유럽의 어느 공항 라운지에서 무료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듯한 깨달음을 받았으며 1996년 부당이득금반환 대법 판례와 관련 민법 조항(370조, 342조 등)을 찬찬히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이에 대해서는 2가지의 학설(특정성보전설, 요건행위설)이 존재하는데 판례는 특정성보전설을 따른다는 것이며 이에 따르면 ‘물상대위권은 질권에 우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특정성보전설에 따르면 근저당 물건의 화재보험 질권에 대해서 확정일자를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소수설인 요건행위설에 따르면 확정일자는 필수가 된다. 하지만 회사 규정에는 화재보험에 무조건 확정일자를 받게 되어 있었으므로 나는 규정 담당자를 수신으로 하여 숨 가쁘게 질의서를 만들어 투척하였으며 이것이 2019년 11월이다.

  ‘<전략>...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화재보험 확정일자 규정에 반대하는 바이오.’

  규정 담당 과장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였다가(아니, 당연히 제3자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 확정일자가 필요하지!) 이것이 규정의 문제가 아닌, 보다 근본적인 법률의 영역이라 판단하여서(특정성... 뭐라고?) 사내 변호사로 이 문제를 토스했다. 이것으로 2차전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사내 변호사는 내가 지적한 대로 물상대위권의 특정성 보전설이 다수설이긴 하지만 혹시나 모를 어떠한 경우(제3자 질권의 위협)에 대해서는 알아서 검토하여 판단해야 된다고 했고, 나는 그 모든 경우를 검토하여 보냈으나 그것은 자신의 영역이 아닌 규정 질의 담당의 영역이라며 다시 토스했으며, 나는 사내 변호사와 주고받은 검토서와 회신서를 취합하여 규정 담당에게 다시 보냈다. 우리의 대화는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계속됐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혹시나 모를 어떠한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잖아.”

  “아니 그러니까 여러 경우를 검토해보면 그런 경우는 없다니까.”

  “그런 경우 말고 다른 경우가 생기면 어떻게 해?”

  “예를 들면 어떤 경우?”

  “그건 모르지. 그러니까 혹시 모를 어떤 경우라고 하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여러 경우를 검토해보면 그런 경우는 없다니까.”

  “그런 경우 말고 다른 경우가 생기면... 아니 우리 전에 이런 대화 나누지 않았나?”  

  그리고 규정 담당 과장은 마치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세상으로 들어간 듯한 현기증을 느끼며 한동안 나와의 연락을 끊었다. 병가를 내고 천장을 보며 누워만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고 세상의 모든 상처가 아물고 혼란이 치유될 때쯤 규정 담당 과장은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나타났다. 외부 법무법인 자문 예산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후후. 이제 제대로 붙어보자. 이번엔 너로 정했다. 가라. 외부 법무법인 변호사!”

  “전문! 전문! 변호! 변호!”  

  전문력 백만 볼트를 내뿜으며 사법고시 출신의 외부변호몬이 튀어나왔다. 외부변호몬은 역시나 녹록하지 않은 전투력으로 10포인트 휴먼명조체로 약 6페이지가 되는 검토서를 보냈다. 결론은 사내 변호사와 다르지 않았는데, 만약 판사가 그날 숙취가 심해서 컨디션 난조로 이전 1996년도 판결을 뒤엎고 소수설인 요건행위설로 바꾸면 어쩌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의 하나인 만약을 위해서 확정일자를 받아두는 게 낫지 않냐는 것이다. 

  4차 대전으로 진입하며 나는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깨닫고 전열을 가다듬고 화재보험사 담당자들을 통해 보험금 가입 및 지급 과정을 조사하는 한편, 2009년도 서울대 법학 저널의 논문과 같은 해의 법무부 연구용역 과제로 제출된 논문을 근거로 나의 주장을 정리했다. 일단 현재의 대법 판결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고, 몇 가지 경합 케이스에 대해 ‘제3자의 질권의 위협’이라는 것이 도저히 존재할 수 없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물상대위권자는 안전하고 그렇기 때문에 확정일자는 필요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외부변호몬은 일본의 판례를 인용하여 질권의 승리를 이끌어 냈다. 그것이 2021년 11월이다. 모든 것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는 최근 다시 읽어본 이 일련의 기록물에서 외부변호몬의 일본 판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를 조사해본 결과 이것은 1968년도 판례이며 이미 폐기되어 1998년 일본 최고 재판소에서 이를 뒤집고, 물상대위권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외부변호몬은 일본 판례 공격은 오류이며 반칙이고 실패였던 것이다. 나는 점심을 먹고 조용한 사무실에서 내부망 이메일 시스템을 열고 규정 담당 과장을 수신으로 하여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암 커밍 백. 이리 오너라~ 롱탐노씨. huh? 오래간만이지? huh? 일본 판례 분석을 들려줄게. 준비하시고. 쏘세요. 리슨... <후략>’ 

  그리고 규정 담당 과장은 나에게 ‘제발, 그만하자...’라는 메시지를 보냈으며 그와 함께 인사팀에 부서 이동 신청을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이 참혹한 전장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산문집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은 기존 질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부정곧 아니다 하고 말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주는 바탕이다       

   


※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포켓몬 (닌텐도)

테넷 (크리스토퍼 놀란)

근저당권의 이론과 실무 (오시정)

생각이 실종된 어느 날 (베르톨트 브레히트)

that that (싸이)

회전목마 (소코도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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