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Aug 11. 2022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22.8.11) 양양, 헤어질 결심, 케니더킹

   

  휴가 동안 했던 것을 한 줄로 적자면

  "강원도에 가서 서퍼들을 구경하며 파도를 타고 오후에는 빙수를 먹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셨다."

  이지만 실제로는 훨씬 어지럽고 고된 일정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던 캘리포니아 비치의 용맹하고 탄탄한 몸매의 서퍼들은 없었고 패들링만 겨우 하고 있는 초급반 서퍼들만 대여용 웻슈트를 입은 채 자라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것은 오후 5시쯤 해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커다란 구덩이를 파고 앉아서 밀려드는 하얀 포말을 눈앞에서 보며 케니더킹의 음악과 함께 레모네이드를 마시는 것이었지만, 회사에서는 처음 맡은 업무들이 산더미 같았고 새로 부임한 팀장은 언제든 내 심장을 파먹을 스라소니의 눈빛이었으며 꿀 같은 휴가는 덧없이 짧기만 할 뿐만 아니라 동거묘인 자이언트 랙돌 하릅은 나의 ‘해변가 구덩이 휴가’ 계획에 전혀 동의해주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부지런히 다닐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지만 뭐든 계획을 짜야 마음이 놓이는 부류이기 때문에 휴가 계획을 보통 시간 단위로 세우고 지도를 펼쳐놓고 동선을 짜며 식당과 카페, 디저트 가게의 메뉴까지 골라놓고 예산을 계산해둔다. (반면에 하릅은 여행을 사랑하지만 계획은 혐오한다.)


  이번 여행의 동선은 속초의 청초수물회에서 점심을 먹고 양양의 글램핑장에서 가서 바비큐와 불멍을 하고 다음 날 서피비치에 가서 맥주와 피시 앤 칩스를 먹으며 야수같이 휘몰아치는 파도를 타며 놀다가 인구해변의 양리단길로 가서 닌베의 혁신적인 빙수를 두 그릇 먹고 주문진항에서 대게로 배를 채운 뒤에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에서 인증 샷을 찍고 한밤의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다음 날 동화가든에 가서 브런치로 짬뽕 순두부를 먹고 아르떼 뮤지엄에서 관람을 한 뒤 강릉 테라로사 본점에서 드립 커피와 간단한 베이커리 디저트를 먹은 후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고, 계획 대비 90% 이상 실행이 되었다.

  나머지 10%의 미이행 분은 지옥의 웨이팅 시간 때문이었다.  순두부 짬뽕을 먹기 위해 1시간 30분을 기다리거나 심지어 테라로사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2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야수의 혓바닥 같은 파도가 나의 마크 제이콥스 선글라스를 날름 삼켜버리는 것도 계획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너무 피곤하고 고단했다. 휴가로 인한 피로를 위한 휴가가 필요했다. '베이케이션'은 노동이었고 ‘포스트 베이케이션’은 재앙이었다. 이 일의 모든 원흉인 하릅은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그렇게 다운돼있어? 뭐가 문제야 세이 썸띵. 이라며 다음 여행은 제발 좀 천천히 쉬엄쉬엄 하자고 덧붙였다. 나는 몹시 분한 나머지 혼신의 힘을 다해 하릅의 볼을 잡아당기며, 이러려고 양양에 갔어?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 하고 말했으며 하릅은 가볍게 내 손을 뿌리치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두둑 꺾으며, 그럼 내가 그렇게 나쁘냐? 하고 응수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완전히 붕괴되었다. 마침내.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Lemonade (케니더킹)

아무노래 (지코)

이전 18화 캠핑은 어마어마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