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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Sep 06. 2022

여름의 끝에서 츠루우메 유즈와 함께 영화를

(22.8.21) 베스트 키드, 느끼고 아는 존재, 포제션

  

  세상에. 벌써 선선해진 공기가 피부에 닿는다. 내가 열렬히 사모하며 기다렸던 여름은 오는 척만 하다가 구름 뒤로 숨어버린 느낌이다. 2022년이 시작하자마자 이번 여름은 얼마나 뜨거울까 나는 내심 설레었다. 수소가 헬륨으로 바뀌는 열병합 에너지가 1AU의 거리를 날아와 한반도에 가장 가깝게 내리쬐는 그 활기찬 계절을 내내 기다렸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비가 오거나 흐린 날씨로 애를 태우더니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나는 여기까지인가 보오.’ 하며 겸연쩍게 돌아서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동거묘인 자이언트 랙돌 하릅에게 말했으나, 하릅은 아무 말 없이 얼음이 가득 들어 있는 글라스 잔에 유자맛이 나는 사케인 ‘츠루우메 유즈’을 가득 넣고는 에어컨 리모컨을 집더니 온도를 22도로 맞추었다.

  “추워. 목도 아프다고.”

  “나는 아직 더워.”

  나는 궁시렁댔지만 하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는 내 집에서 당장 나가라고 했지만,  여름을 경외하는 휴먼과 에어컨을 숭배하는 고양이 중 굳이 한쪽이 나가야 한다면 휴먼이 나가는 것이 맞다는 놀라운 궤변을 펼쳤다. 그리고는 요즘 푹 빠져 있는 ‘베스트 키드’를 계속해서 시청했다.

  나는 하릅의 태도에 어이가 없어서 지금 나의 심정을 표현하고자 베스트 키드를 멈추고,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포제션’을 틀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지하도에서 들어선 이자벨 아자니가 알 수 없는 현대무용처럼 팔과 다리, 목과 허리를 마구 휘젓고 괴성을 지르면서 뒹굴고 있는 장면이었다.

  “저게 뭐지?”

  하릅이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에어컨의 추운 온도로 인해 나의 정서가 만들어낸 심상의 표상”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느끼고 아는 존재’에 의하면 감각을 처리하는 신경지도들은 이미지의 기초가 되고 이미지는 마음의 내용물을 이룬다. 의식이라는 것은 뇌 안의 물리적인 과정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의 몸체 안 비신경 조직들이 의식적인 모든 순간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는 것이다. 추위라는 원초적 상태가 무의식적인 뉴런 반응으로 내 몸의 위험을 나타내는 정서로 입력되고 이것이 느낌이라는 생물학적 현상으로 이어지며 나의 후두엽은 이자벨 아자니의 영상을 불러왔다.      

  발광을 하던 이자벨 아자니가 결국 바닥에 주저앉더니 온몸에서 피와 점액 같은 걸쭉한 액체를 쏟아냈다. 극 중에서 샘 닐이 역할을 맡은 남편 마크는 아내가 자신을 떠나간 이유를 찾기 위해 뒤를 밟게 되는데, 아내는 다름 아닌 대머리 촉수 괴물과 매일매일 환상의 붕가붕가(!)를 하고 있었다. 플라톤은 모든 예술적 창조는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이상적인 형태가 어렴풋이 재현된 미메시스라고 말했고 그런 점에서 나는 안드레이 줄랍스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안드레이 줄랍스키는 폴란드에서 쫓겨난 이후, 이혼까지 겹치게 되는데 이때의 혼란과 분노를 담아 광기에 취한 채 포제션의 시나리오를 써 내려간 것이기 때문이다. 스토리만 보면 믿기지 않겠지만 이자벨 아자니는 이 영화로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심사위원들이 이혼남이었을까?) 특수효과를 맡았던 카를로 람발디는 다음 해에 스티븐 스필버그와 함께 동심의 세계로 가서 E.T. 를 탄생시켰다.

  “으, 집어치워! 역겨워.”

  하릅이 나에게 짐볼을 집어던졌다. 나는 현란한 풋워크로 살짝 피하며 라이트 훅으로 짐볼을 날려버렸으며 하릅에게 경고했다.

  “쿵푸같은 거는 다 거짓말이야. 다 영화일 뿐이야. 게다가 가라테가 나오지 않는 가라테 키드라니 정말 어이가 없군. 실전은 복싱이라구.”

  ‘베스트 키드’는 2010년 성룡과 제이든 스미스(윌 스미스의 아들)가 함께 찍은 영화인데 원제는 ‘The Karate Kid’ 즉, 가라테 키드이지만 배경은 중국이고 키드인 제이든이 사부인 성룡에게 ‘쿵푸’를 배우는 내용이다. 가라테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1984년에 나온 원작(3편까지 나왔다.)은 확실히 (엉터리이긴 하지만) 가라테를 배우는 내용이었다.


  나는 태권도 키드라는 제목의 영화를 떠올려 봤다.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 주인공 소년이 자신을 괴롭히는 이탈리아계  아이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기로 한다. 마침 동네에 아이키도 도장을 하고 있는 스티븐 시걸을 만나게 된다. 소년은 스티븐 시걸에게 배운 ‘관절 꺾어 몸통 돌리기 기술’로 태권도 대회를 나가게 되고 첫 대회에서 자신을 괴롭히던 이탈리아계 아이와 조우하게 된다. 소년은 스티븐 시걸에게 배운 ‘관절 꺾어 몸통 돌리기 기술’로 이탈리아계 아이의 목을 꺾어 버리고 상대 아이는 기절하게 된다. 이때 심판인 이동준이 나타나 이 소년에게 실격처리를 하게 되고(태권도에는 꺾기 기술이 없다...) 소년의 사부인 스티븐 시걸에게 달려가 이단 옆차기를 하여 날려버린다.(이때, ‘클레멘타인’이 OST로 흐른다.) 자신의 아이가 반칙으로 목이 꺾여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계 마피아 두목 알 파치노는 기관총을 난사하며 경기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한편, 알 파치노는 며칠 전 플로리다의 해변에서 서핑을 하고 돌아오던 중 아르마딜로를 로드킬 하고 마는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지만 사실 그것은  전설의 킬러(키아누 리브스)가 전 여친에게 선물 받은 포켓몬 ‘모래두지’였고, 이미 난장판이 된 경기장에 키아누 리브스가 정장을 입고 나와 모래두지의 복수를 갚기 위해 마피아를 모두 소탕해 버린다. 그렇게 영화가 끝나는 듯하더니,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에 쓰러져 있었던 스티븐 시걸이 조용히 일어나 키아누 리브스의 목을 꺾어 버리고 관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그대로 줌인...)


  하릅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자리에 일어나서 학다리로 중심을 잡았다. 그리고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묻자, 나에게 최면술을 걸어 정신을 분산시킨 다음 학다리 권법 발차기로 나의 턱을 날려버릴 예정이라고 했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베스트 키드 (해럴드 즈워트)

포제션 (안드레이 줄랍스키)

클레멘타인 (이동준)

존윅 (채드 스타헬스키)

느끼고 아는 존재 (안토니오 다마지오)

포켓몬 (TV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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