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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May 29. 2022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22.5.29.) 다시 만난 세계, 보르헤스, 픽션들

   

  이번 주 내내 집에 돌아오면 보르헤스의 단편을 읽었다. 보르헤스가 1941년도에 발표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작품이었다. 샤워를 하고 저녁을 먹고 캔맥주 카스를 뜯어 한 잔하면서 빈백에 앉아 뻑뻑한 눈을 억지로 뜨며 책을 들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약 20년 전 이 단편을 처음 읽고 굉장히 어지럽고 난감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출판사에서 내가 주로 했던 일은 여러 가지 잡일이었는데, 부장의 담배 심부름부터 시작해서 창고에 있는 쥐 소탕작전 등등에 투입되었다. 시간이 굉장히 많이 남는 일이었기 때문에 나는 종종 디자인팀에 놀러 가서 유일한 남자 직원 훈님에게 포토샵을 배우거나 때때로 사무실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잡담하거나 혹은 근처 로드샵에 가서 쇼핑을 하곤 했다. 출판사 옆에는 중앙 도서관과 극장들이 있었는데, 나는 쌀집 자전거를 타고 심부름을 다니며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와서 읽었고 6시에 퇴근하고 나면 새로 개봉한 영화들을 보고 가와사키 바이크를 타고 집에 들어갔다. 한 개인이 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행복해도 이 우주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했다.

  그날도 나는 인쇄소에 심부름을 갔다가 도서관에 들렀고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빌려왔다. 그리고 내 자리에 앉아서 가장 첫 번째 단편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읽었다. 나는 책을 덮고 좀 짜증이 났는데, 이 대단하다고 하는 남미의 작가가 쓴 이 대단하다고 하는 작품이 어떤 대단한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단편의 화자는 보르헤스 자신이며 1인칭 소설로 시작되는데, 시작부터 보르헤스는 자신의 실제 절친 비오이 카사레스와 함께 1인칭 소설에 대한 논쟁을 벌인다. 그러면서 비오이 카사레스가 ‘우크바르’라는 지역의 그노시즘 종교 지도자의 어록(거울과 성교는 사람들의 수를 늘리기 때문에 혐오스러운 것이다.)을 인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 ‘우크바르’라는 지역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나, 작중의 보르헤스는 해적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 지역을 발견했다고 뻥을 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을 뒷받침하기 위해 가상의 참고문헌을 언급하는데, 그 참고문헌의 저자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들이 뒤섞여 있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백과사전에는 우크바르의 문학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고 하면서 ‘틀뢴’이라는 가상의 행성에 대한 문학이 있다며 다시 한번  뻥을 친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하게 보르헤스는 작중에서 ‘틀뢴’에 대한 백과사전을 발견하게 되고 이 백과사전이 전체 40권 중에서 11번째 백과사전이라고 허풍을 치기 시작한다. 이 백과사전의 이름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이다. 라틴어로 Orbis Tertius이며 ‘제3의 세계’라는 뜻이다. 즉, 이것은


  가상의 나라에서 만든 가상의 세계관에 대한 가상의 백과사전에 대한 가상의 서평이다.    

  

  그 백과사전은 틀뢴이라는 혹성의 언어, 종교, 과학, 논리 등을 소개하고 있고 보르헤스는 실존 인물(번역가, 비평가, 소설가 등)들을 등장시켜 그들의 비평들을 소개한다. 물론 이것도 뻥이다. 여기서 소설은 끝나는 듯싶더니, 갑자기 1947년의 후기라는 소제목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발표는 1941년이므로 이 역시 가짜 후기다.) ‘틀뢴’에 대한 백과사전인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얽혀 있던 백만장자의 음모가 드러나고, 이 가상의 이야기는 현실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실제 세계에 침범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종교와 지적 설계론을 비판하기 위해 바비 헨더슨이 제시하고 리처드 도킨스가 언급한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 종교’가 결국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지에서 정식으로 종교로 인정을 받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국내 AR 기술 업체인 맥스트가 2022년 8월  오픈할 예정인 개방형  메타버스 서비스의 이름을 '틀뢴'이라고 명명하면서 틀뢴은 결국 현실에 존재하게  되었다.)


  나는 당시 속은 것 같은 억울한 마음에 에메랄드 스즈키 험버트라는 가상의 작가를 만들었고 ‘수직 낙하하는 스킨로션은 불타오른다’라는 원고지 10매 분량의 가짜 서평을 작성해서 여러 독서 커뮤니티 게시판에 업로드를 하였는데 약 한 달 뒤, 그중의 한 게시물에 자신도 에메랄드 스즈키 험버트의 팬이라는 댓글이 달렸고, 덧붙여서 그의 두 번째 작품 ‘그러므로, 에스프레소 익스프레스’를 언급하면서 스페인 작가 케베도의 콘셉티모스와 비교하는 짤막한 글을 올렸다. 나는 그의 네이버 블로그를 타고 들어가 보았고 그가 당시에 서평으로 유명한 파워 블로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댓글에는 황당하게도 그 책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감상이 여러 개 올라와 있었고 약 10년 후, 내가 즐겨보던 씨네21에서 제임스 완의 인터뷰에서 에메랄드 스즈키 험버트의 세 번째 소설 ‘바로 그, 바로크 벤자민’의 영화화 대한 이야기가 실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영화는 정말로 2023년 6월 개봉 예정이다.)


  그 이후로 나는 이 보르헤스의 작품집을 단 한 번도 쳐다본 적이 없다. 어쩌다 대화에서 그의 이야기가 나오면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가짜 책에 대한 가짜 서평을 굉장히 정성스럽고 난해하게 쓴 남미 작가 정도의 평가를 했을 뿐이다. 그때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동거묘 하릅은 OB맥주 부사장이 그런 유명한 작가인 줄은 몰랐다고 했고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던 나는 네이버 검색 결과 OB맥주 부사장 나탈리 보르헤스가 최근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보르헤스를 읽으며 마셨던 맥주의 제조사의 부사장도 보르헤스였다니.

  하지만 요즘 나는 우연한 기회에 이 작품을 다시 보면서 RISS에서 찾아낸 2개의 논문 (보르헤스의 단편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의 서사구조(전기순), 문학적 독서의 전형, 보르헤스의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최명호))을 함께 읽고 나서야 내가 그동안 이 소설의 의미를 얼마나 오독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J.R.R. 톨킨이 ‘반지의 제왕’을 출간한 1957년 이전에 발표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단순히 가짜 작가의 가짜 서평을 쓰고자 한 것이 아니다.  ‘틀뢴’은 톨킨이 완성한 ‘아르다’의 행성의 중간계 세계관인인 ‘레전다리움’과 그 결과물 ‘반지의 제왕’을 예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톨킨의 피조물들은 보르헤스가 서문에 정신 나간 짓이라고 밝힌 아래의 방식의 완벽한 안티테제가 되었다.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   

       



아래의 작품들을 언급했습니다.     


다시 만난 세계 (소녀시대)

픽션들 (호르세 루이스 보르헤스)

만들어진 신 (리처드 도킨스)

반지의 제왕 (J.R.R. 톨킨)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MBC ever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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