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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11. 2024

모두를 위한

  “월요일 일곱 시 삼십 분에 하카타역 빵집 앞에서 만나.” 지난주 남편과 나는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비행기 공포증이 있는 남편은 결혼 전부터 일본 여행, 그중에서도 후쿠오카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일본을 좋아해서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배를 타고도 쉽게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부산 출신인 남편의 본가에서 부산항까지는 십 분이면 가는 데다 배는 비행기보다 수속 절차도 간단하다. 결혼 후 우리는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남편은 일본에 ‘배를 타고’ 가기 위해 여행 이틀 전에 겸사겸사 부산으로 갔다. 그렇게 나는 비행기를, 남편은 배를 타고 후쿠오카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후쿠오카에서 만날 정확한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월요일 일곱 시 삼십 분에 서울역이 아닌 하카타역 앞에서 만나자고 하니 여행이 아니라 일본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근사해졌다.


  사실 이번 여행은 후쿠오카보다는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규슈의 화산, 아소산에 가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아소산에 가기 전날 저녁 일곱 시 삼십 분에 하카타역에서 만난 우리는 야키토리에서 닭 껍질 꼬치와 두부튀김과 맥주를 저녁으로 먹고 남편의 친구가 운영하는 바에 갔다.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자 바의 ‘마스터’인 로빈은 사실 육십 대 할아버지다. 나이 든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근사한 식당과 카페와 술집을 종종 만날 수 있다는 게 일본의 가장 멋진 점이 아닐까 자주 생각한다. 다음날 한국과 운전석이 반대인 차를 렌트해서 아소까지 가야 했지만 여행 첫날의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는 살짝 과음을 했다. 로빈은 우리에게 새로 연 라라포트라는 곳에서 거대한 건담을 볼 수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 자이언트한 건담에 우리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로빈은 건담 이야기를 꽤 길게 이어 나갔다. 나는 건담을 엄청 좋아했던 학생이 생각났다. 내가 ‘만들기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던 학생. 만들기의 제왕은 자주 속이 빤히 들여다보는 질문을 했다.  “선생님, 누가 잘해요? 만들기를요. 누가 제일 잘해요?”


  만들기의 제왕은 저학년 때부터 학교 방과 후 교실에서 건담 프라모델 수업을 들었다. 방과 후 교실 신청 기간이 다가오면 학생은 행여나 신청 기간을 놓칠까 걱정이 되어 매일 나에게 꼭 프라모델 수업을 신청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육 학년이 되기 전 만들기의 제왕과 헤어졌는데 오 학년 말쯤에는 매일 중학교에 가서도 지금처럼 프라모델 수업을 들을 수 있을지를 물었다. 그건 선생님이 알 수가 없다고 대답해도 소용이 없었다. 만들기의 제왕은 건담뿐만 아니라 베이킹도 잘했고 종이접기도 잘했으며 모든 공예활동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무엇을 만드는 중이었든 가지고 있는 재료로 건담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었는데, 플레이콘으로 수박 부채를 만들다가도 건담을 만들었고 종이로 직육면체를 만들다가도 건담을 만들었다. 나는 자주 진심으로 감탄해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어? 정말 대단하다!” 만들기를 할 때처럼 꼼꼼한 성격 탓에 한글 쓰기에 힘과 시간이 많이 들어 쓰기를 싫어했던 만들기의 제왕은 말하기도 조금 서툴렀다. 한 번은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하는 학생을 친구가 답답해하자 만들기의 제왕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내가 말을 좀 못 해!” 나는 그 이후로 만들기의 재왕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던 것 같다.


  아소로 떠나기 전 차를 렌트하러 가던 길 화장실에 우리나라에 흔히 적혀 있는 ‘장애인 화장실’이라는 이름 대신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꼭 장애인만을 위한 화장실이 아닌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라는 이름이 좋았다가, 이내 세상이 얼마나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닌지를 증명하는 것 같아 서글퍼졌다. 우리는 무사히 차를 렌트하고 휴게소에서 소금빵과 멜론빵을 사서 세 시간 정도를 달려 아소에 도착했다. 아소산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산과 칼데라가 만들어내는 풍경이 무섭게 아름다워 눈물이 찔끔 났다. 목적지였던 분화구에서는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는 화산 가스를 보았다. 그리고 그 곁에서 태연히 혹은 태연하지 않게 살아가는 삶을, 가만히 오랜 세월 축적되어 온 자연의 압도적인 풍경을, 감히 판단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지점을 생각했다.


  가끔 만들기의 제왕이 궁금하고 보고 싶다. 중학교에 가서도 학생이 프라모델 수업을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지 곁에 있는 누군가가 학생의 서툰 말하기나 느린 한글 쓰기보다는 종이 직육면체로 건담을 만들어내는 재능을 봐주었으면 좋겠다. “틀렸어.”라거나 “잘못됐다.”라는 말보다는 “대단하다.”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그래서 여전히 자신감 있게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면 좋겠다.


  아소산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겨울의 억새도 아름다웠지만 여름의 푸르름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겠지. 언젠가는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생각보다 더 오랫동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작은 변화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같은 사람의 눈을 왈칵 달구게 하면서, 무섭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뒤에 놓인 우리의 세상에서도 모두가 그 자리에 아름답게 존재할 수 있기를. 모두를 위한 학교, 모두를 위한 지하철, 모두를 위한 영화관, 모두를 위한 공원, 모두를 위한 식당과 카페, 우리가 누리는 세상을 모두가 누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더 이상 ‘모두를 위한’이라는 말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기를. 그런 생각을 하며 아름다운 아소산과 아쉽게 작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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