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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Jun 07. 2024

금동대향로와 막국수

  교실 창문을 모조리 열어놓고 차르르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멍하니 내다보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온다. 놀러 가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린단다. 출근하면서 날씨가 좋아 나도 여행 생각을 하기는 했다. 제천이랑 충주에 다시 가볼까? 아니면 가을마다 가던 영주에 봄에 한 번 가보는 것도? 그래도 산은 역시 강원도인데…. 그러다 문득 떠오른 곳이 부여였다. “나 부여 가보고 싶었어.” 부여. 이름만 들어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느낌이다. 왠지 진짜 재밌을 것 같다.


  금요일, 이른 퇴근을 하고 부여로 향했다. 좋아하는 곳에 또 가는 것도 좋아하지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갈 때면 기분이 조금 더 상기된다. 파릇한 산들 사이를 두 시간 정도 달리고 나니 생각보다 금방 부여에 도착했다. 오래된 빵집에서 튀김 샌드위치와 옥수수 빵을 샀고 급하게 예약한 작고 고요한 한옥 숙소의 마당에서 발바닥과 코만 하얀 까만 고양이와 함께 소고기를 구워 먹었다. 활짝 열린 대문 밖으로 봄의 너른 논밭과 해 지는 하늘이 내다 보였다.

 

  부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빼놓아도 어디를 가나 지나게 되는 백마강의 풍경이나 낮고 오래된 주택과 레트로한 간판이 만들어내는 부여의 분위기는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에도 부여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것이 하나 있다면 바로 금동대향로였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중요하고 귀한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여행에 특별한 기분을 선사했다. 단정한 한옥의 마루에 앉아 숙소 앞 카페에서 사 온 커피와 전 날 산 빵을 아침으로 먹고 금동대향로가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출발했다. 부여의 자부심인 금동대향로를 보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더 설렜다. 조급한 마음으로 전시실을 차례대로 관람하다 실제로 금동대향로를 마주했을 때는 ‘입이 쩍 벌어진다’는 표현이 실감이 났다. 금동대향로를 장식하고 있는 악사와 인면조를 보며 이 엄청난 향로를 만들었을 옛사람들을 떠올렸다.


  화려하고 정교한 데다 번쩍번쩍 빛까지 나는 백제의 보물을 보고 난 후 허기 가 진 우리는 부여에서 가장 유명한 막국수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부여는 어디를 가도 참 한적해서 좋다고 생각했는데 식당에 도착하자 금동대향로를 보러 온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부여에 있는 사람들 다들 막국수 먹으러 왔나 봐.” 긴 줄을 보자마자 남편에게 주차를 맡기고 식당 입구로 뛰어가 줄을 서자 사뭇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님의 얼굴이 보인다. 메뉴는 오로지 막국수와 편육 둘 뿐. 번호표도 없고 이름을 적는 곳도 없다. 사람들은 줄을 서 기다리다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받아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나무로 둘러싸인 식당에는 낭만적인 평상 자리가 있었고 내 키의 삼분의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문으로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면 풀과 흙이 잔뜩 보이는 창문이 있는 방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식당의 멋짐과 별개로 막국수는 사실 우리 입맛에 그다지 맞지 않았는데 맛이 지나치게 시큼하고 강했기 때문이다. ‘편육을 막국수면에 감아 드셔보세요.’라는 글귀에 따라먹어보았더니 그 이유가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되었다. 부드럽고 기름진 식당의 편육은 머리가 찌릿할 정도로 신 막국수면에 감아 먹었을 때 가장 맛있었다. 조금의 실망감을 안은 채 식당 밖으로 나오니 줄은 아까보다 더 길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부여의 자부심은 금동대향로가 아니라 막국수가 아닐까?


  부여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는 규암마을의 책방과 양조장에도 들리고 궁남지의 연못을 따라 자전거도 탔다. 이런 알찬 여행은 오랜만이라 한껏 뿌듯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가는 데 얼마 전에 우리 반 학생이 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는 선생님이랑 이렇게 공부하는 시간이 제일 행복해 요. 음…. 힘든데, 행복해요.” 수학 시간이었고, 십 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들었던 말 중 가장 행복한 말이었다. 힘든 공부도 나랑 하면 행복하다는 학생의 말에 스스로가 정말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주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진다. 금동대향로처럼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국보급 교사는 되지 못하더라도, 학생이 해준 말 덕분에 누군가의 실망감이나 불호에 개의치 않고 묵묵히 한 자리에서 아주 오랫동안 막국수를 만드는 정도의 자부심은 나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부여에 다시 간다 해도 아무래도 또 그 막국수집에 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편육은 면에 말아먹어야 맛있는 것처럼, 행복하고 맛있게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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