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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Nov 12. 2024

숲이 아닌 나무, 먼 곳이 아닌 발 아래

 가르치는 학생 중 그림 그리기를 아주 좋아하는 학생이 한 명 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학생인데, 자폐성 장애를 지닌 많은 학생이 그렇듯 시각적인 능력이 뛰어난 학생이다. 놀랍게도 이 시각적인 능력은 언어적인 능력까지 이어져 이 학생은 한자나 영어까지 하나의 그림처럼 인식해 유달리 빨리 습득한다. 모두에게 한자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시대에 교사가 되어서 무척 다행인 것은, "선생님 이 낱말의 한자는 뭐예요?"라는 질문에 "아 그건 선생님이 잘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한 번 검색해 볼게."라고 대답할 수 있어서이다. 추석에 대해 수업을 하면서 성묘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학생이 난데없이 "살필 성! 고양이 묘!"라고 외쳐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성묘의 '묘'는 당연히 '고양이 묘'가 아니라 '무덤 묘'이지만 나는 혼자 무안해서 얼굴이 벌게지고 말았다. 한자어인 성묘의 한자가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묘의 '성'은 '살필 성'이 맞았으며 나는 그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이 학생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학생의 그림에서 나의 이름을 발견한 적이 있다. 무언가 잔뜩 끄적인 그림에 화살표 표시가 있었고 '이지원 선생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나를 그린 거야?' 하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그림을 자세히 보았는데, 그곳에는 작은 동그라미 하나만 그려져 있었다. 팔다리는 물론 눈코 입까지 모두 생략된 채로. 그냥 동그라미였다. 나는 그냥 작은 동그라미였다.


 "이게 선생님이야?"

 "네, 이지원 선생님이에요!"

 "왜 선생님이 동그라미야?"

 "선생님은 동그라미니까요!"


 까르르 웃으며 학생은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들고 뛰어다녔고, 나는 그 모습이 귀엽고 유쾌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동그란가를 한참 생각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조금은 갸름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얼굴이 매우 동그랗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렸을 때의 별명은 호빵맨, 자라서는 토마스 기차였고, 그 사실은 어렸을 적 나의 콤플렉스이면서도 이제 와서는 새삼 자랑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내가 생각하는 나의 매력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학생이 그린 동그라미에 덜 상처받을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일화가 또 하나 있다. 피자 만들기 수업을 하며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나는 대한민국의 대표 음식으로 '비빔밥'을 선택해서 학생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주 탱글탱글하고 노란 계란이 얹어진 전주식 비빔밥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음식의 이름이 뭘까요?"라고 묻는 나에게 그 학생은 아주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계란!"이라고 소리쳤다. 사실 우리 반 학생 중 어떤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여 대답할 수 있는 학생은 그 학생뿐이었고, 대답에 이어 수업을 이끌어나가려고 했던 나는 난처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계란이라고? 계란이라니. 이건 계란이 아니야. 비빔밥이잖아.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봐야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 대답은 틀린 게 아니었으니까.


 어떻게든 비빔밥이라는 대답을 끌어내려 애쓴 덕분에 나는 결국 "비빔밥."이라는 대답을 들었고 우리는 모두 맛있는 피자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대답을 끌어내는 과정이 옳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스스로도 옳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그 과정의 질문들은 모두 잊어버렸다.


 나무가 아니라 숲을 봐야지, 발아래가 아니라 먼 곳을 봐야지, 그런 말을 자주 들으며 살았다. 지금은 숲보다는 나무가, 먼 곳보다는 발아래가 중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을 떠나 각자가 지닌 의미란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햇볕이 아주 따뜻한 날 집으로 가는 길에 갖가지 화분이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화분이 담벼락에 만들어 낸 그림자가 아주 근사했던 사실, 뜨거운 여름 바다 가운데에서 햇빛이 차르르 바다의 물결 위를 흐르는 장면을 목격한 사실, 주황색과 연두색, 마른 갈색이 섞인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나의 무릎보다 더 커서 놀랐던 사실, 아주 얕게 첫눈이 쌓인 눈밭을 조심스레 밟았을 때 뽀드득, 하고 동시의 표현과 같은 소리를 들은 사실.


 나는 나의 학생이 비빔밥과 나를 보던 시각을 영영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밥과 갖가지 색의 나물이 아니라 노란 계란만이 중요한 장면을, 눈코 입이 아니라 동그란 테두리만이 뚜렷한 얼굴을, 세상의 조언을 계산하지 않은 시각을 말이다. 비빔밥을 볼 때 가장 값비싼 고기나 색색의 나물에, 얼굴에서 굳이 눈코 입에 집중하지 않아도 될 때 삶은 어떤 것이 될까? 숲 보다는 나무를, 먼 곳보다는 발 아래를 볼 줄 아는 삶, 생각만해도 신나고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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