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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Sep 10. 2024

색깔을 맡는다

  우리 집 막내 복동이는 올해 열네 살이 되었다. 이제 확실하게 노견으로 불리는 나이. 복동이가 열 살이었을 때 강아지가 이제 나이를 먹어서 슬프다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했는데 “아이고, 열 살이면 청년이지!”란 대답이 돌아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열 살의 복동이는 정말 청년이었다. 개에게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긴 세월이지만 열네 살의 복동이도 다행히 제법 건강하다. 복동이는 매일 아침 아빠와 산책을 간다. 아빠 말로는 사람으로 치면 만보를 걷는 셈이라고 한다. 복동이의 건강 비결이 본인이라고 믿고 있는(사실 우리 가족 모두 본인이 제일 복동이를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빠는 누군가 복동이의 나이를 물으면 자꾸 복동이의 나이를 부풀린다.  얼마 전까지는 열여섯 살이라고 하더니 최근에는 열여덟 살이라고 한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는 상대의 반응을 보며 즐거워한다.


  복동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한쪽 눈에서 백탁 현상이 보이는 듯 해 병원에 갔고 백내장이 진행 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의 기분은 정말 절망적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양쪽 눈 다 백내장이 진행 중이고 한쪽 눈은 진행이 아주 빨라 수개월 내에 실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복동이가 곧 앞이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최악의 상황처럼 여겨졌다. 나는 복동이가 몇 걸음 떼다 벽에 부딪히는 장면을 상상했다. 조금이라도 백내장의 진행을 늦추기 위해 안약을 넣어주고 강아지 백내장에 좋다는 영양제를 거금을 주고 사서 먹였다. 냄새가 지독하기로 악명이 높은 영양제였는데 복동이에게 한 번 먹이려면 진이 다 빠졌다.  


  어느 날 복동이가 시력을 모두 잃게 되어 여기저기에 부딪히느라 몇 걸음도 제대로 걷기 어려운 날이 올 것이라는 염려와는 달리 복동이는 여전히 잘 짖고 잘 뛰고 아침마다 만보를 걷는다. 그렇다고 복동이가 예전처럼 잘 보이는 것은 아니다. 복동이는 아빠를 쳐다보며 간식을 내놓으라고 짖다가 아빠가 방에 들어간 줄도 모르고 허공을 쳐다보며 짖고, 내가 집에 돌아와도 가까이 다가가 큰 소리로 “복동아, 누나 왔어!”라고 말하지 않으면 내가 온 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고구마를 던져주면 오 초 정도는 냄새를 맡아야 어디에 고구마가 있는지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복동이는 여전히 목욕을 하고 나면 털을 말리느라 집 안을 우다다다 하고 뛰어다니고, 겁 없이 뛰어다니다 어딘가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는 우리와 달리 의연하게 집 안을 다시 활보한다. 그런 복동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서 ‘개는 왜 개일까?’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개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개가 시각에 의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는 시각이 없어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개는 온갖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후각만을 사용해 ‘공간의 지도’를 만든다. 다큐멘터리에서는 이것을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색깔을 맡는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람은 시각을 주요 감각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나는 색깔과 모양, 통로와 벽, 닫혀 있는 문과 열려 있는 문 같은 것들을 코로 킁킁 맡는 복동이를 떠올렸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게 되면 불쌍해서 어쩌냐고 걱정을 하는 나를 보며 복동이는 ‘내가 불쌍하다고?’하며 코웃음을 쳤을지 모른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사람들은 자주 연민 어린 시선을 보낸다. “얼굴도 예쁜데, 참 안 됐어.” “선생님 반 애들을 보면 불쌍해요. 부모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다. 학교에서 보내는 오전과 오후,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기도 하고 깔깔 웃게도 한다. 아이들 스스로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강당 수업을 한 데다가 체육 경기에서 이기기까지 했다면 신나고 행복할 것이고, 어려운 데다 지루하기까지 한 사십 분의 수업 시간을 견뎌야 했거나 수학 문제를 몽땅 다 틀리고 말았다면 속상하고 불안하기도 했을 것이다. 학생은 체육 경기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한 채 경기에 참여했을지도 모르고 발표를 하거나 질문을 할 때 수업과 상관이 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불쑥 내뱉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친구들이  이겼다며 소리를 지를 때 함께 소리를 지르며 강당을 뛰어다니고, 때로는 엉뚱하지만 창의적인 대답을 해 칭찬을 받고서는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크게 웃으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매일을 보낸다. 때때로 하기 싫은 수학 과제를 미루기 위해 투정을 부리며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복동이가 냄새를 맡으며 만든 ‘공간의 지도’가 어떤 모양일지 상상해 본다. 색깔을 맡는다는 감각은 내가 알 수 없는 감각이고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복동이가 아빠와 아침마다 만보를 걸으며 오로지 냄새로만 만들어 나가는 ‘공간의 지도’ 역시 어떤 형태일지 가늠하기 어렵다. 확실한 것은 보이지 않는 복동이를 불쌍하게 여겼던 마음은 나의 초라한 관점에서 비롯된 쓸데없는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언제까지 아침마다 만보를 걸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복동이는 색깔을 맡으며 남은 날을 살 것이고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방법으로 세상을 경험하며 자랄 것이다. 그 안에서 내가 할 일은 그 경험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응원하고 지지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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