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시기 뿌수려다가 부동산까지 갔다 온 썰
코로나로 인해 길어지는 재택근무에 완벽하게 적응한 나는 평일에는 가족 외의 사람은 전혀 만나지 않았고 주말에도 늘 보는 친구 외에는 새로운 사람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거리두기 정책을 핑계로 대부분의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집에서 책을 읽거나 피아노를 치는 것이 내 취미의 전부였다. 본래 정적인 취미를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에 크게 미련이 없는 성격이라 집 밖의 세상과 다소 단절된 듯한 내 일상은 나에게 정신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되다 보니 내면은 안정되었으나 삶이 너무 지루했다. 일에도 흥미를 완전히 잃었고 새롭게 내 관심을 끄는 것들도 없었다. 그래도 나름 20대의 막바지인데 인생이 이렇게까지 잔잔해도 되는 것인가? 내가 원래 이렇게 의지도 열정도 없이 무미건조한 사람이었던가?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이지? 본질적으로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그 결과, 평화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한 공허함에 빠져 있음을 깨달았다.
원인은 파악했고 이제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일단 내 주변의 환경을 바꾸는 것에 시작했다. 내면을 다스리고 바꾸는 것보다는 바깥의 것들에 변화를 주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굉장히 차분하고 이성적인 척하면서 글을 쓰고 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그냥 싹 갈아엎어 버리고 싶다.’의 상태였다.
그래서 조금 극단적이지만 회사를 바꿔보려고 했다. 마침 평소 관심 있던 스타트업 관계자와 연락이 닿아 커피 챗을 해보기도 했고 자기 전에는 괜히 원티드에 들락날락거렸다. 하지만 이미 2년 간 집에서 내내 재택근무를 한 엉덩이가 무거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풀 재택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으로 이직하는 선택은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굉장히 좁았다.
무엇보다 현재 내가 속해서 일하고 있는 팀은 너무 좋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모든 직장인이 공감하겠지만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과 같은 팀을 이룬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내 개인적인 방황을 끝내기 위한 목적으로 벗어나기엔 너무 아까웠다. 결국 이런저런 핑계와 합리적인 이유들로 이직 생각은 얼마 안 되어서 접었다.
다음으로는 일하는 공간을 갈아엎었다. 공부 제대로 시작하기 전에 괜히 책상 정리하고 싶어지는 거는 학생 때나 직장인이 되었을 때나 똑같은 것 같다. 모니터 받침대를 새로 사고 책상 위 물품 배치를 바꾸고 디퓨저도 새롭게 구매했다. 역시나 효과는 미미했다.
나에게는 이직보다는 약하지만 책상 정리보다는 강하고 확실한 ‘갈아엎음’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다 과감하게 거주지를 바꿔보려고 했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코로나와 관계없이 재택근무 제도가 계속 유지될 확률이 높은 상태였기에 회사와 비교적 먼 위치에 사는 것이 가능했다. 자취 한 번 해보지 않은 내가 드디어 독립할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이번엔 호갱노노와 직방 어플을 들락날락 거리며 전셋집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가진 돈에 비해 쓸데없이 눈이 높고 취향이 까다로웠다. 방 2개는 있었으면 좋겠고, 주차는 편해야 하고, 화장실 크기가 작으면 안 되고, 신축이었으면 좋겠고, 위치는 송파구였으면 좋겠고.. 내가 찾는 것은 전셋집이 아니라 유니콘이었다.
물론 매매의 세계는 더 암울했다.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집들은 남들도 다 살고/사고 싶어 하는 곳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4년도 되지 않았던 사회 초년생은 엄두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그것도 아주 어마어마하게.
당시 부동산 관련 유튜브를 정말 많이 찾아보았는데 나의 상황에 대한 답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월세고 전세고 그냥 가만히 부모님 집에 꼭 붙어살면서 열심히 회사 다니면서 저축하다가 저평가된 구축 아파트 찾아서 전세 끼고 매매.’ 하지만 난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나가서 나가서 살 수 있는 집을 원하기도 했고 내 취향과 선호도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그것들을 다 무시하고 남들이 사야 된다고 하는 집을 심지어 빚을 내가며 사야 하는지 스스로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출퇴근도 안 하는 주제에 감히 서울로 독립을 하려고 해? 너 돈 많냐?”
내가 본 모든 콘텐츠들이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살고 싶은 집을 사기에는 충분한 돈이 없었고 부동산 투자는 빨리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좋은 투자 방법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에는 철이 덜 들었다.
결국 부동산을 투자의 관점으로 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독립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보기만 해도 아득해지는 집값을 보며 우울해하고 있던 차에 HR 팀에서 전사 사원을 대상으로 메일을 하나 보내왔다.
메일 : [Hybrid work 1.0을 시작합니다.]
업무가 가능한 곳이라면 국내 어디에서나 근무가 가능합니다.
국내 어디서든 내 집이 아닌 공간에서도 업무가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며 막연하게 언젠가 업무와 여행을 병행하는 워케이션(Workation)을 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그것을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허용해준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OO에서 한 달 살기’라는 선택지가 추가되었다.
직장인의 신분을 유지하며 연차 소진 없이 원하는 지역에서 장기간 머무를 수 있다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기회였다. 국내 한정이라는 것은 다소 아쉬웠지만 코로나라는 이슈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해외여행은 그다지 끌리지 않았고 한국에도 제주도나 부산 같이 평소 긴 호흡으로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들이 있었기에 충분히 좋은 소식이었다.
워케이션은 한정적인 생활 범위에서 벗어나 새롭고 다양한 인풋을 나에게 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었고 동행자만 구하면 비용도 비교적 합리적인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