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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Jan 25. 2024

웃으려고 봤다가 오열한 사연, <김씨 표류기>

<김씨 표류기>, 이해준,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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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심 속 무인도에 갇힌 남자 김씨

우울한 건 관두고 즐겁고 행복하고 많이 웃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며 다짐을 하고 꺼내든 첫 영화는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였다. '언젠간 봐야지 리스트'의 상단에 있기도 했고, 고립된 지역에 살다보니(?) 도심 속 무인도에 있는 모양새가 나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 겸사겸사 보게 되었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원치 않는 분은 뒤로가기!.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인 남자 김씨(정재영)가 한강의 한 다리 난간 밖에 서있는 것으로 시작한다. 회사에선 구조조정을 당했고,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애인은 떠나가 코너에 몰린 그는 마지막으로 대출 업체와 통화를 한다. 돈을 빌리더라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 그는 강물에 뛰어드는 걸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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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죽는데 실패하고 만다. 김씨는 나레이션으로 쓸쓸하게 이렇게 말한다.

"X신. 죽는 것도 못합니다."

그가 떨어진 곳은 도심 속 무인도. 한강의 밤섬이었다. 눈 앞에 63빌딩이 보이는데, 바로 앞에 강변이 보이는데, 머리 위 다리로 차가 지나다니는데도 나갈 길은 없다. 그는 한강 유람선에 손을 흔들어 구조를 요청하기도 하고, 수영해서 탈출해보려고도 하지만 실패하고 돌아온다. 모래사장에 HELP라고 구조 신호를 써도 무용하다. 마지막 희망으로 한 칸 남은 배터리의 휴대폰으로 119나 애인에게 전화를 해보지만 외면당한다. 최후의 통화는 전화를 걸어 제 할말만 늘어놓는 텔레마케팅 광고였다. 그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좌절한 그는 넥타이를 나무에 걸어 목을 매려한다. 이젠 진짜로 생을 마감하려할 때 어디선가 사이렌이 울린다. 바로 '민방위 훈련' 경보였다. 그는 민방위 끝나면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뭇거리다가 끈을 목에 건다. 이제 끝내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배에 갑자기 신호가 온다. 급똥이었다. 김씨는 딛고 있던 돌에서 내려와 일단 일부터 보러 수풀로 뛰어간다.


볼일을 보려고 쪼그려 앉은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바로 빨간 사루비아(샐비어)였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것에 다가간 그는 꽃을 하나 따서 꿀을 빨아먹는다. '백 년 만에 느껴보는 맛' 잊어버리고, 잃어버렸던 그 맛을 감각하며 김씨는 오열한다.


김씨는 열심히 살아왔을 터다. 사랑보다는 엄격함이 앞섰던 아버지의 훈육도, 무능함이 가장 나쁘다고 말하며 떠난 애인이나, 구조조정으로 그를 밖으로 내몬 회사도 다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벌어진 과거들이다. 휩쓸린 인생.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떠밀려 무인도에 갇혀버린 인생. 그 인생은 어린 시절부터 정해져있던 걸까? 아마 아닐 게다. 사루비아 꿀을 따먹던 시절의 김씨는 장래희망을 그리고 미래를 도모하는 어린이였을 테다. 그는 태도를 바꿔 살아가는 것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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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는 밤섬으로 쓸려온 쓰레기들을 주으며 생활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생계는 나무에 돋아난 버섯을 먹으면서 연명해간다. 그러나 사람이 버섯만 먹으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나뭇가지에 포크를 달아 작살질도 해보고, 마대자루를 잘라 족대를 만들어 낚시를 해보지만 여의치 않다. 새를 잡으려고 트랩을 설치하고 나무 위를 타보지만 외려 새똥만 맞고 역부족이다. 새에게 욕을 하면서, 물가에서 주운 세재로 머리를 감던 그는 오염된 물에 죽어 떠오른(?) 물고기를 줍고, 그 물고기를 쪼아먹다 죽은 새를 구워 먹으며 단백질도 보충하는(?) 지경에 오른다. 

이젠 이곳에 사는 것에 익숙해진 그는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HELP사인도 HELLO로 바꿔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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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버려진 오리배를 찾아내며, 담보대출로도 살 수 없던 내 집 마련의 꿈도 이루며 안빈낙도 하는 삶을 만들어 간다. 심심하다는 것 빼고는 의(혼자 있으니 팬티 1장이면 충분하다), 식(단백질까지 가능), 주(오리배는 새똥과 비를 막아준다)가 해결되는 나름대로 행복한 인생을 제 손으로 이뤄낸다. 유람선이 밤섬 근처로 다가와도 그는 외려 수풀에 몸을 숨긴다. 돌아가봐야 행복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남자 김씨가 '없는' 와중에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그의 표정을 주목해서 보았다. 처음 밤섬에 떨어졌을 때의 그는 시종일관 인상을 쓰고 있었다.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심지어는 죽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무능함'과 '무력감'에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내 손으로 하나씩 터전을 마련해가면서 그는 웃고, 혼잣말을 하고, 행동한다. 


이전까지 김씨 인생의 정의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의해 휩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삶은 '내가 움직인 만큼 나아지는 것'이라는 걸 그는 매일 매일 몸으로 체득해간다. 내 손으로 일구어낸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억만금이 주어진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 주체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해진다. 내 영역이 넓어지고, 그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내 것'을 만드는 일이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달라진 그에게도 부족한 건 있었다. 바로 '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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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스스로 세상에서 자신을 지운 여자 김씨

남자 김씨는 아무도 자신을 못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빤스만 입고(?) 다니는 무인도 생활을 한다. 애석하게도 그건 그만의 착각이었다. 지구 상에 단 한 사람, 여자 김씨(정려원)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있었다.


여자 김씨는 3년 째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는 히키코모리다. 과거에 놀림을 받던 상처 때문에 스스로 세상에서 자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들의 미니홈피 사진을 도용해 자신인양 업로드 하는 가짜 계정을 운영한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달 사진 찍기다. 아무도 없으면 외롭지도 않기에, 아무도 없는 달의 사진을 찍는다고.


같은 맥락으로 그는 1년에 두 번 있는 민방위 훈련을 기다린다. 다들 실내로 대피해 아무도 없는 세상을 마음껏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느 훈련 때처럼 카메라 스코프를 이리저리 옮기던 김씨는 밤섬에서 어떤 남자가 목을 매는 장면을 목격하고 만다. 바로 남자 김씨였다.


너무 놀라 카메라에서 눈을 떼고 자신만에 방(옷장)으로 도망간 김씨는 남자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날 살아서 돌아다니는 그를 보며 안도한다. 그날부터 그에 대한 '관측'은 시작된다.


양자역학에서는 세상에 파동으로 존재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관측'되는 순간 입자가 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리 도심 속 무인도에서 남자 김씨가 살아가고, 존재한다고 해도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발견되고, 관측되기 전까지는 그는 누구에게도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여자 김씨가 스코프 너머로 확인한 시점부터는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자 김씨는 외롭지 않으려고 아무도 없는 곳(달)을 택한 사람이기에, 모두에게 외면 당해본 아픔을 알고 있기에, 없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 심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고립된 사람에게는 누구도 따뜻한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설령 누군가 손을 내밀어 준다고 해도(여자 김씨의 어머니) 제대로 받을 줄도 모른다는 걸 너무나 잘 안다.

자신도 세상으로부터 잠적한 '없는 사람'이기에 상식적인 선의 해결책, 이를테면 '구조', '신고' 같은 선택은 하지 않는다. 대신 없는 사람의 방식으로 남자 김씨의 없음을 지켜주고 싶어 한다. 모래 사장에 쓰인 HELLO라는 사인에 답장을 쓰는 정도의 선을 지키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하는 것'이 아니다. '돕는 것'도 아니다. 딱 손을 내미는 정도까지만.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이해가 되어서 슬몃 눈물이 났다(이때부터 오열의 조짐이 있었다.)


스스로 가짜 프로필로 숨어드는 선택을 했지만, 그렇게 한 이유도 결국은 나 아닌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에서 였을 게다. 상처받고 외면받고 고립되더라도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그에겐 항상 있었다. 그는 연결을 위해 몇 년간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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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람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헬맷에 우산에 풀무장을 한 상태로 말이다. 여자 김씨가 남자 김씨에게 소통하는 방식은 '유리병 편지'다. 와인병에 프린트한 종이를 담아 다리에서 섬으로 던지는 방식이다. 3개월 하고도 17일 후에 남자 김씨가 발견한 그 편지에는 단 한 단어만이 적혀있었다.


HELLO


"안녕하세요."에는 무탈하고 편안하느냐는 안부가 담겨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녹아있다. 무인도에서 살아가던 남자 김씨에게 '안부'는 어떤 의미였을까. 세상도, 가족도, 애인도 외면해 스스로를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하는 그에게 준 작은 '관심'은 여자 김씨가 꿈꾸던 '연결'이자, 살아가는 힘이 되었을 게다. 내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는구나. 아직 살아있구나. 하는 감각을 느꼈을 테다.


지독한 고립과 우울 속에서도 내가 죽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이 '연결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회사와 직업을 떼고 아무것도 없는 존재가 되어서야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시선이 바깥에 있던 것 같다. 착한 척 하느라고 애써 눌러왔던 억울함과 원망이 봇물터지듯 흘러나왔다. 물론 그마저도 혼자 있었기에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 불순물들을 뒤집어 쓴 건 도로 나였다. 세상에 나 혼자만 아프고, 괴롭고, 외롭다고 생각했더랬다.

한 차례의 파도가 지나가자 도망가듯 끊어냈던 주변이 보였다. 전화번호부를 보니 90%가 연락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우지는 않았지만 무용해진 그 인맥들을 보며 허탈해 할 때, 손을 내밀어 준건 나머지 10%였다. 그제야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다시 연결되었다는 기쁨, 그리고 흔쾌히 손을 잡아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으로 가득 찼다.

그 시기에 비로소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도 연결이 끊어진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좋아하는 것이 마땅히 없어서요>나 이 글을 쓰는 이유도 나와 같은 사람이 고립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시작했다.


여자 김씨가 건넨 편지에 남자 김씨는 응답한다. 모래 사장에 HOW ARE YOU?라는 되물음으로 말이다. 답변은 한국인이라면 조건반사로 튀어나오는 답변 'Fine Thank You. And You?'였다. 사소한 안부 하나가 주는 연결감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을 연결시켜주었다.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 살아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된 것이다. 오프라인인 두 김씨는 아주 오랜만에 온라인으로 진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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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짜장면 한 그릇의 희망

남자 김씨는 여느날처럼 쓸만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니다가 우연히 짜파게티 봉지를 줍는다. 그것도 16g의 스프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을 말이다. 무염식(?)의 건강한 식단을 이어오던 그는 속세의 맛을 그리워 하며 "짜장면 먹고 싶다."고 계속 되뇐다. 짜장면을 먹지 않았던 과거를 복기하며 <인터스텔라> 급의 회환을 곱씹는다. 주변의 풀들을 빻아서 면을 만들어보려 하나 역부족이다. 온종일 짜장면만 생각하던 남자 김씨는 한참을 누워있다가 번뜩이는 생각을 떠올린다.


허구언날 똥을 싸재끼는 새똥 속에 씨앗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똥을 심어서 키운다면 그 안에 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목표가 생긴 그는 땅을 갈기 시작한다. 그저 짜장면을 먹겠다는 일념으로 밭을 일구는데 모든 것을 다 쏟아붓는다. 시간은 차고 넘치게 많기에, 될 때까지 그는 시도를 하겠다는 마음으로 똥을 심는다. 


이 장면은 남자 김씨에게 생존 외에 처음으로 '나만의 목표'가 생긴 순간이다. 그의 삶처럼 우리는 회사든 학교든 '남의 목표'을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그 안에서 돈을 벌고 학위를 따면서 내 목표를 달성하는 것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를 위해'라기 보다는 '해야하는 일'인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짜장면 먹기'라는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 없는 일이라도 그에겐 '의미'가 되는 것이다.


이를 관찰하던 여자 김씨는 그의 절실함을 이뤄주기 위해 짜장면을 종류별로 배달을 시켜준다. 어디든 배달을 간다는 철가방 남자는 X발, X발 하면서 오리배를 타고 밤섬에 기어코 남자 김씨에게 가져다 준다. 그러나 김씨는 머뭇거리더니 다시 돌아가려는 철가방 남자에게 짜장면을 돌려준다. 그는 왜 그랬을까?


열받아서 씩씩거리며 여자 김씨의 집으로 가서 그릇은 가지고 알아서 하라고 짜장을 던져놓는 철가방에게 여자 김씨는 묻는다. 그 사람이 뭐라고 하던가요? 인상을 쓰며 철가방은 답한다.


자기한테 짜장면은 희망이라고요.


목표의 결과만을 생각한다면 세상엔 너무도 쉬운 길이 많다. 돈만 내면 남의 손을 빌려 단숨에 도착점에 도달할 수 있다. 허나 그렇게 달성한다면 그게 의미가 있을까? 남자 김씨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짜장면이야 먹을 수 있고, 당장에 행복할 수 있겠지만 그간 자신이 들여온 시간들, 비단 미련한 짓이고 시간낭비일지도 모르는 그 과정들이 허탈해질 거라는 걸 그는 알았다. 그렇게 자신의 희망을 지키기 위해 거절을 택한다. 여자 김씨도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깨닫고 I AM SORRY라는 편지를 보낸다. 


새똥 밭에서 김씨는 길게 자라난 옥수수를 발견한다. 옥수수로는 면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그는 허수아비를 들고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리고 세상의 기준이 아닌, 나만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서 비로소 옥수수를 수확하는 결과에 도착한다. 


나무위키 - <김씨 표류기> 일본 예고편 유튜브 캡쳐

스스로 일궈낸 희망에 도달한 그는 경건하게, 또 게걸스럽게 짜파게티 분말로 만든 짜장면을 먹는다. 솟아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엉엉 울면서 눈물 젖은 짜장면을 먹는다. 이 뿌듯한 장면을 보면서 환희가 차올라야할 텐데, 보는 나도 눈물이 빵터져버렸다. 코미디 영화를 보다 이렇게 울 일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추지가 않았다.


짜장면을 먹는 김씨에게 해결된 건 하나도 없다. 그가 있던 사회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로또에 당첨된 것도 아니다. 앞으로도 짜장면을 먹을 환경이 된 것도 아니다. 단 한 번. 일회성의 식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을 뿐이다. 허나 그 단 한 번의 식사는 그가 살면서 겪어본 적 없는 유일한 경험이었다.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매진했던 '나만의 목표'에 도달한 순간. 희망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과정에 대한 보상. 그 모든 것을 이뤄낸 자신에 대한 존중까지. 그깟 짜장면이 아니라, '그 짜장면'이기에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던 것일 게다.


나는 한 번이라도 짜장면 한 그릇을 만들만큼 매진한 적이 있는가. 당연히 있었다. 

그럼 지금도 그렇게 매진하는가. 아니다. 남 눈치나 보며 레퍼런스를 찾고 적당히 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가. 아니다. 매일 불안하고, 괴롭다.

그럼 어떻게 살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이어가다보니 답은 이미 나와있었다. 타인의 시선이 어떻든 내 기준으로 세운 나만의 목표를 온힘을 다해 이뤄가는 것. 그것이 주는 충만감과 쾌감을 느끼는 것. 그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너무 많은 시간을 남 눈치나 보면서 대충 보낸 것 같아 마음이 애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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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Who Are You?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고도 한참을 울다가 눈물을 닦고 메모장을 켰다. 희망과 연결감이라는 키워드를 적었다. 우리는 살면서 어느 순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내 의지나 내 뜻은 뒷전이고, 대의나 공공의 목표에 따라 휩쓸리듯 살아가는 순간은 어떻게든 찾아온다. 현실 도피를 하는 두 김씨처럼 무인도로, 쓰레기가 가득한 방으로 낙오될 지도 모른다. 모두가 자신을 외면하는 고립에 빠질 수도 있다.


남들에게 나의 통제권을 내어준 결과로 '없는 사람'이 되어본 사람은 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두렵다. 미래는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풀리는 일 하나도 없다. 갑갑하고, 막막하고, 답도 없는 시간이 끝없이 반복된다.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김씨 표류기>는 'Who Are You'라는 질문을 던진다. 답을 하려면 '나'를 소개해야 한다. 이름을 말하든, 좋아하는 것을 말하든, 내 존재를 드러내야만 한다. 답을 하는 순간 '나'는 이름을 지우고 살아가는 익명 씨에서 세상에서 유일한 '나'가 된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고,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독보적인 '나'로 관측된다. 당신의 정체를 묻는 일은 손을 내민 쪽에서 할 수 있지만 대답은 온전히 스스로의 몫이다.


터널의 끝에서 들어오는 빛은 더 가면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조금만 더 가면 세상과 만날 수 있다는 연결감을 준다. 그러나 내 발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내 몸의 통제권을 갖고 한 발 씩 내딛지 않는다면 출구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생각하고, 바라는 방향을 선택해야만 기나긴 고립에도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때론 '아니. 고작 이만큼도 내가 가지면 안 되는 거야?' 싶은 시간들도 찾아올 테다. 내 의지와 상관 없이 링 밖으로 끌어져 내쳐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나라는 것만 안다면, 함께 나아갈 연결된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내일을 도모할 수 있다.


그냥 맘편히 웃을 생각으로 골랐다가 웬걸 꺽꺽거리며 오열하며 본 영화. 그러면서도 다시 힘내서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받은 '좋은 영화' <김씨 표류기>였다. 다음엔 말장난 많이 하고, 그냥 웃기만 영화를 봐야지 다짐하면서 글을 마친다. 오늘 점심은 짜장면을 먹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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