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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요마 Feb 01. 2024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 <킬러들의 수다>

<킬러들의 수다>, 장진,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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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runch.co.kr/@hakgome/577

1. 사람들이 필요로 하기에 대신 죽여주는 네 남자

웃자고 코미디 영화를 보려다가 <김씨 표류기>를 보고 엉엉 울어버린 다음에는, 말장난이 많은 영화를 골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장진 감독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불쑥 던지는 코믹한 한 마디, 이걸 지금 하는 게 맞아? 싶은 아이러니들, 꼬이고 꼬여서 일이 점점 산으로 가는(?) 코드까지 그는 나의 원픽 감독 중 하나였다. 다만... 오오오랜만에 그의 영화 <킬러들의 수다>를 다시 보고나서는 '엄...' 해졌다. 여전히 재밌고, 여전히 신선하고, 여전히 흥미로움은 있었지만 이번에도 기대했던 마냥 '웃자고' 볼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나옵니다. 원치 않는 분은 뒤로가기!.


네 명의 킬러 집단(?) 상연(신현준), 정우(신하균), 재영(정재영), 하연(원빈)은 의뢰를 받아 사람을 제거해주는 킬러다. 상연은 변장을 이용한 설계를, 정우는 폭파를, 재영은 저격을, 하연은 보조 역할을 하면서 나름대로의 역할 분담을 통해 의뢰를 완수해간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뒤를 밟히게 되는 빌미를 주고 만다.


수 년간 조 검사(정진영)가 잡아 넣으려고 쫒던 문배(손현주)와 연관된 인물을 킬러들이 제거하면서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는 일이 벌어진 것. 조 검사는 연관 인물 살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이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킬러들의 일상은 평소 다를 바 없다. 아침 뉴스 앵커 오영란(고은미)이 예뻐서 뉴스를 매일 보고, 평범하게 사람을 죽이고, 장을 보고 집에서 밥 해먹고 산다. 


그들도 직업적으로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일 뿐 감정이 없는 로봇 같은 인물이거나, 공감 능력 없는 살상무기는 아니다. 다만 일이라서 할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도 딜레마는 찾아온다. 한 여자를 죽여달라는 의뢰를 받고 찾아간 정우는 권총에 소음기를 낀 후 타깃에 총을 겨눈다. 차 안에서 불을 켜고 무언가를 보고 있던 그 여자는 울고 있었다. 차마 죽일 수 없던 정우는 총구를 내리고,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확실히 죽이기 위해 아파트로 향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는 죽일 수 없었다. 어색하게 마주치게 되어, 옆집이라고 둘러대던 그의 눈에 여자의 불룩한 배가 들어왔고, 이내 이사했다며 건넨 떡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한편 상연에게도 한 여고생 여일(공효진)이 찾아온다. 모른 척하면서 애써 거절하던 그였지만, 여일은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그들의 집까지 찾아온다. 킬러들은 자신들은 그런 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며 돌려보내지만, 여일은 하연을 만나며 음식을 전해주거나, 하소연을 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풋풋한 20대 초반의 공효진 배우와 원빈 배우의 투샷을 보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독보적인 자리를 만들어간 두 배우의 이 영화에서의 역할은 미약한 존재들이다. 형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아직 총을 쏘는 역할도 부여받지 못한 예비(?) 킬러 하연, 영어 선생에게 몹쓸 짓을 당하고 학교에 가지 않고 배회하는 여일. 두 사람은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떻게든 나아갈 수 있지만 자신들의 입장에 갇혀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라는 공허함이 당장엔 발목을 잡지만 그것을 털고 결국엔 (영화엔 자세히 나오진 않지만) 다음 스텝으로 나아간다는 점이 위로가 된 장면이었다.


정우가 타깃을 죽이지 못한 것에 상연은 분노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라며 하연이 중재해 결국 그들은 의뢰를 물리는 선택을 한다. 그들에겐 '감정'이 있었고, 그 감정이 흔들리면서 하지 못하는 일들이 생겼다. 다만, 감정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의뢰도 받을 수밖에 없게 된다. 상연은 꿈에서 결혼까지도 상상했던 뉴스 앵커 영란의 의뢰를 받는다. 자신과 사귀었던 연극배우의 햄릿 공연에서, 햄릿이 죽을 때 무대에서 죽여달라는 것.


계속해서 킬러들의 뒤를 밟던 조 검사에 의해 경찰-검찰이 쫙 깔린 무대가 함정인 걸 알면서도, 그들은 그 사랑 때문에(이번에는 팬심에 가까운 사랑) 일을 벌인다.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잔상으로 남았던 두 장면이 이 영화에서 나왔구나 새삼 깨닫는 모먼트. 왼쪽은 신하균이 지휘를 하듯 오페라 음악에 맞춰 폭파를 하는 장면, 오른쪽은 타깃이 죽어 나비처럼 피가 번지는 데 그걸 모르는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 다시 봐도 인상적인 연출이었다.

성공적으로 살인을 마친 후 상연은 조 검사에게 노골적인 추격을 당한다. 마주한 두 인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영화는 대략 이런식으로 마무리가 된다. (스포 방지 차원에서 뒷 이야기는 생략)





2.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 의뢰 받지 않은 이는 죽이지 않는다.

일단의 감상은 기대만큼 막 웃기지는 않았다는 거... 다만, 생각해볼 거리는 좀 있었다.

나레이터 하연은 영화 말미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거.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이유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거.

사람들이 왜 이렇게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하는지 아직도 난 잘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르겠지.

하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산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스스로 자수하고 잡혀가겠다고 말하는 상연을 조 검사는 풀어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너희 같은 새끼들은 굶겨 죽일 거야." 킬러들이 굶는다는 얘기는 사람을 죽여달라는 의뢰가 끊긴다는 이야기고, 그런 악의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 표명일 테다. 그러나 하연의 나레이션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킬러들을 고용하고, 누군가를 죽이길 바란다.


문배처럼 자신이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바람이 난 남편이 아기를 죽이려고, 한때는 사랑하던 사람에게 상처받아서 같은 '평범한 마음'으로부터 살인은 시작된다. 사랑하고, 후회하고, 증오하는 감정을 청부살인으로 해결한다는 설정이 과장된 것 같긴하지만 그들의 수요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에서 용서는 없다. 캐주얼한 복수와 끝맺음만이 남았다. 지난하게 평생 품고가는 죄책감도, 그로인한 공포감도 없다. 다만 요술램프처럼 그들은 돈을 받고 일을 행할 뿐이다. 그러나 와중에도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 머뭇거리는 주저함, 차마 죽이지 못하는 흔들림이 그들은 조금이나마 사람답게 표현했을 뿐이다.


요즘은 용서는 물론이고, 책임을 지거나 사과조차도 거부하는 사회가 된 것 같다. 킬러들이 가진 '인정'조차도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내 목적에 부합하지 않으면, 내 편에 속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나(이를테면 인터넷 악플) 육체적으로나(묻지마 폭행, 살인) 상해를 가하는,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조금씩 조성되는 것 같다. 더불어 자신과 전혀 관계 없는 사람들 마저도 피해자가 되는 일들도 너무나 많이 벌어지고 있다.


연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안전의 보장과 사회적 차원의 안전망이 작동하는 상식적인 세상이기를 바랄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 한 편에는 악의가 도사릴 수 있다. 그것이 순수악이든, 애증이든, 살의든 상관이 없다. 그걸 없애거나 통제할 수도 없다. 하연의 말처럼 간절히 원하는 그 바람들은 특이점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반복될 터니 말이다. 그럼 어떻게 킬러들이 굶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감독의 답은 형들의 싸움을 중재하던 원빈의 사랑 예찬에 들어있던 게 아닐까.


정우횽은 지금 사랑을 하고 있는 고야

횽은 몰라. 사랑이란 그런 고야.

한없이 영롱하고 투명한 고야.

그 투멍하믐 어떤 시기와 질투 미웅과 붕노도 다 이길 수 있는 고야.

사란하는 사람에겐 그 누구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고야.

그게 바루. 위대한 사랑의 힘이야!

지금 인간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고야!


'사랑을 하는 고야!'라는 명대사와 함께 이만 글을 마친다. 



다음 영화 예고



다음엔 담보된 웃음으로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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