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주껏 Jun 27. 2024

“난 뜨거운 것도 못 만지고 칼도 쓸 줄 모른단 말야“

아이의 말(1) 부모 돌봄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토로하다

 “엄마! 나 물 좀 떠다 줘!”


 오늘도 어김없이 물을 대령하란다. 잠자리에 들려고 불을 끄면 아이는 꼭 물타령이다. 밤에 이불에 실수를 할까 봐 마시지 않았으면 싶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짝 귀찮은 마음을 꾹 누르며 몸을 일으켜 주방으로 향한다. 그래, 이래서 엄마지. 엄마는 내가 원하는 모든 걸 해주는 존재니까. 물을 따라와 아이에게 물컵과 함께 한 마디를 같이 건넨다.


“우리 딸도 엄마가 늙으면 엄마 돌봐줄 거지?“


 아이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최근 노화와 죽음에 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감정이 격해지듯 울던 아이였다. 그래서 가능한 죽음 얘기는 피하고 돌봄으로 돌려 말했던 것인데, 아이는 ‘늙음’이란 단어에서 바로 죽음을 연결 지었다.


 “싫어! 난 엄마 아빠랑 오래오래 같이 살 거야!”

“그래. 죽지 않고 엄마가 오래 살려면 딸이 엄마가 아플 때 돌봐줘야지.”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다. 아이는 계속 울먹이며 말을 이어간다.



“난 뜨거운 불을 만지기도 무섭고 칼을 쓸 줄도 모른단 말이야. 싫어 싫어!”


 엥,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엄마를 돌봐달라고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불과 칼이라니. 그렇다. 아이는 엄마를 돌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음식을 하는 행위와 바로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놀라웠다. 첫째, 돌봄을 받아오기만 한 여섯 살 나이의 아이에게도 자신을 돌보는 엄마가 가장 에너지를 많이 들이는 돌봄 행위가 바로 ‘요리’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둘째,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일이기에 가볍게 말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아이는 마치 그 돌봄을 진짜 자신이 해야 하는 책무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너무 재미있는 동시에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그리고 돌봄의 순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한다. 내가 부모에게 받은 돌봄이 나의 아이에게 전달되고, 그 돌봄은 다시 나에게 내 부모에게 돌아간다. 둘 다 사랑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고된 과정이다. 아래를 향한 (양육) 돌봄이 기쁨과 희망을 동력으로 삼는다면 위를 향한 (간병) 돌봄은 슬픔과 회한이 깔려 있다는 것이 큰 차이다. 이것을 배운 적도 없는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몫은 위를 향한 돌봄이 고되지만 추억을 길어내는 행복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주어야겠다. 교육은 다른 게 없다. 내가 직접 실천하면 된다. 내가 나의 부모에게 그러한 돌봄을 돌려주는 모습을 아이가 보고 자랄 수 있게 하면 된다.


 그것을 알려 준 우리 딸에게 나는 오늘도 돌봄을 받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