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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껏 Oct 04. 2024

"지금 난,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화가 났다고."

아이의 말(7) 내면 감정의 강도를 알 수 있는 아이와 나만의 암호

 어느 날, 아이가 신이 나서 뛰다가 철퍼덕 바닥에 넘어졌다. 양쪽 무릎이 콘크리트 바닥에 쓸렸는지 발갛게 피가 비쳤다. 얼마나 쓰라릴까 싶어 내 마음도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이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번쩍 들쳐 안고는 "괜찮아, 괜찮아." 달래보아도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이는 지금 모든 신경이 따끔거리는 신경에 집중되어 있다. 이럴 때면 신경을 돌릴 만한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저런 말을 건네어 본다. "달리다가 갑자기 넘어졌어?" "응 ㅜㅜ." "얼마나 아파? 손톱만큼?" "아니, 훨씬 더!ㅜㅜ" "저 나무만큼?" "아니 더! ㅜㅜ" "그러면 엄마 사랑하는 만큼?" "..."


 갑자기 아이는 대답을 멈추고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아픔'의 정도를 나타내는 말은 주로 "엄청", "너무", "죽겠어"와 같은 부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엄마가 아픔을 비유하기 위해  '엄마 사랑하는 만큼'이라는 긍정의 표현을 꺼내 들었기 때문이겠지. 나의 작전은 나름 성공이었다. 엄마가 던진 반전 표현이 흥미로웠던지 밝아진 표정으로 답을 했다. "응,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아파." "아고, 정말 많이 아팠구나."라고 호응하고는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발라줬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며칠이 지났다. 밤 10시 전에는 잠자리에 드는 걸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날따라 아이는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늦게 자보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림책을 계속 읽어달라고 졸라댔는데, 그 요청을 계속 들어주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어느 순간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제 그만! 자야 할 시간이니까 그만 읽고 얼른 자자!"

"싫어! 읽어 줘!"

"안 돼! 잘 시간이야."

"더 읽어 줘!!"

"안 된다고. 엄마 먼저 잘게."


에라 모르겠다, 아이를 등지고 벌렁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아이는 어디 해보자는 식으로 소리를 질러대며 울음을 짜냈다. 


"왜? 뭐가 불만인데??"

"지금 난, 엄마를 사랑하는 만큼 화가 났다고!"

"???"


말문이 막힌 나는 잠깐 사이에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얼마 전 내가 했던 표현을 그대로 나에게 돌려주는 아이의 활용 능력에 먼저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아이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정확히 공감할 수 있었는데 마음은 따뜻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짜증과 화는 온데간데없이 녹아내리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고, 우리 딸이 정말 많이 화가 났구나. 오늘은 코 자고 내일 책 많이 읽어줄게." 나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응, 알았어. 내일 백십 권 읽어줘야 해." 아이도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줬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은 참 놀라운 힘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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