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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금빛빌라 501호

지도앱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멈춘 곳은 낡은 건물 앞이었다. 금빛빌라. 1층에는 편의점 간판이, 2층에는 애견미용실 간판이 붙어있다. 3층과 4층 유리창에 걸쳐 붙은 상호는 ‘금기도ㅅ시’. 닳아선지 누군가의 장난인지 절반쯤 벗겨졌지만 원래는 금빛독서실이다.

건물을 꼭대기까지 쓱 올려다본 후 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 금빛빌라 501호. 저녁 6시.


시간은 방금 6시 1분으로 바뀌었다. 나는 계단을 두 칸씩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남의 돈 받고 일하는 거, 그거 쉬운 일 아니다.’

2년 전 여름,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던 내게 아빠가 한 말이다. 돈이야 언제든 벌 수 있으니 지금은 공부를 하라는 거였다. 대학은 가도 좋고 안가도 그만이지만 커서 앞가림이라도 하려면 남들이 아는 건 같이 배워둬야 한다고 했다.

흥! 지금 와서 보니 정말 웃기는 소리다. 자기는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못했으면서.

계단은 옥상으로 향하는 철문 앞에서 끊어졌다. 철컥, 문이 열리고 깡마른 체구의 아주머니 한분이 나타났다. 흰머리가 절반쯤 섞인 부스스한 머리에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리고 있다. 아주머니는 나를 위 아래로 훑더니 옆으로 비켜서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옥상으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컨테이너 건물이다. 외벽은 회색 페인트를 칠한 철판이고 녹과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고등학생이죠? 몇 학년이에요?”

“1학년, 이요.”

2학년이라고 말할 걸 그랬나. 그래봤자 미성년자인 건 마찬가지지만.

입구로 보이는 문에는 까만 글씨로 숫자가 적혀있었다. ‘501호’. 제대로 찾아왔다. 스무 번이 넘도록 지원서를 낸 내게 유일하게 와보라고 말해준 곳. 연락이 온 걸로 치면 학교 뒤 편의점이 먼저였지만 거기서는 보호자의 동의서를 요구해서 포기했다. 멀고도 먼 구직의 길. 뉴스에서 청년실업이 어쩌고 취포자가 어쩌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구인공고를 하나씩 넘기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바로 여기였다. 공고제목은 ‘모자 가게’ 네 글자가 전부였고, 업무도 단 한 줄로만 적혀있었다.

- 판매 및 데이터 관리

이 낡고 녹슨 건물에서 도대체 뭘 팔고 무슨 데이터를 관리한다는 걸까.


내부는 생각보다 아늑했다. 밖에서는 보지 못했던 창문 네 개가 천장 가까이 붙어있었다. 한쪽 벽면의 나무 진열대에는 다양한 모자들이 칸칸이 진열되어 있었다. 진열대 앞으로 가게를 가로지르듯 기다란 테이블이 있고 안쪽 자리에 노트북이 열린 채 놓여있었다. 노트북 맞은편 자리에는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잠깐만 구경하며 기다려줄래요?”

사장님이 노트북이 놓인 자리에 앉으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네.” 

대답하며 남자 옆에 놓인 물건을 슬쩍 봤다. 검정색 야구모자였다. 태그를 떼지 않은 새 모자다.

사장님께는 죄송하지만 가게는 겨우 내 방 정도 크기였고 구경이라 할 것도 없었다. 눈으로 내부를 빙 훑은 후 진열대 가운데 칸에 위치한 동그란 거울 앞에 섰다.

풉, 아빠가 봤으면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허수아비 같다고 놀렸겠네.

눈 아래로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모자를 파는 쪽이 아니라 사는 쪽이어야 할 것 같다.

“지루하죠?”

손님이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를 들여다보는 사이, 사장님이 물었다.

“괜찮아요.”

진심이었다.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고마운 입장이니까.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집이 불편한 돈 없는 고등학생이 시간을 보낼 곳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진열대에는 모자가 스무 개 남짓 있었는데, 종류가 다 달랐다. 야구모자부터 비니, 페도라, 베레모까지. 그 중 가장 얼굴을 많이 가려줄 것 같은 벙거지 모자를 집어 머리에 써보았다. 기다림을 지루해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는 의도도 있었다.

모자는 맞춤형 가발이라도 되는 것처럼 머리에 착 달라붙었다. 다시 거울을 봤다. 모자로도 푹 팬 볼은 가려지지 않았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떠올랐다.

손님이 가게를 나가자마자 사장님이 다가왔다.


“이거라도 먹어요.”


사장님이 건넨 건 유리병에 든 토마토주스다.

얼떨결에 건네받긴 했지만 나는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하필 토마토라니. 먹자마자 입술이 부어오를 텐데.

1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내가 먹을 시간을 충분히 주겠다는 듯 노트북 앞에 다시 앉았던 사장님이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냉장고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른 음료도 많아요. 편하게 꺼내 먹어요. 그리고 그 모자는, 이제 그만 벗는 게 좋겠어요.”


여태 모자를 쓰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린 참이었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얼른 모자를 벗었다.

사장님과 우유를 한잔씩 나눠 마시고 나란히 노트북 앞에 앉았다. 까만 배경화면 안에 폴더와 파일들이 한 줄로 정돈되어 있었다. 사장님은 한글파일 하나를 띄우고 찬찬히 읽어보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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