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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귤예지 Oct 27. 2024

지우와 승호 (1)

해가 서서히 가라앉는 저녁, 지우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거리는 차들의 경적과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대화로 붐볐다. 적당한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지우의 뺨을 훑고 지나갔다.

지우는 밝은 조명으로 물들어가는 상점들을 훑었다. 20분 후 공연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승호선배가 쓸 모자를 직접 고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뜬 마음으로 학교를 나왔지만 15분 째 모자 가게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자 설렘은 점차 조바심으로 바뀌어 갔다.

미리 판매한 입장권은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지우네 학교는 물론 주변 다른 학교에서도 꽤 많은 학생들이 입장권을 샀다. 대부분 승호선배를 보려는 거라고 지우는 확신했다. 지우가 승호선배 때문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연극동아리에 들어온 것처럼.


지우는 1학년 1학기 때부터 선배를 알았다. 선배는 전교 1,2등을 다투는 모범생인데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기도 했다. 연극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선배였다. 선배의 어머니가 오래 전 활동을 관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영화배우라는 건 전교생이 아는 사실이었다.

친해지려고 연극동아리에 들어왔지만 지우는 선배에게 말 한마디 걸어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가까워지기에 선배는 너무 완벽했고 자신은 한없이 초라했다. 선배와 어울리려면 적어도 지수언니 정도는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친자매지만 지수언니와 지우는 아주 달랐다.

언니는 부드럽고 하얀 피부에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가졌지만, 지우는 사시사철 간지러운 아토피성 피부에 곱슬머리였다. 몸 곳곳에 손톱자국이 있었고 겨울철에는 발꿈치나 허벅지 주변이 나무껍질처럼 단단해지곤 했다. 그게 부끄러워서 지우는 늘 긴팔만 입었다.

언니만큼 예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자신이 선배를 좋아하는 걸 알면 모두가 비웃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지우는 혼자서만 선배에 대한 마음을 키워왔다. 선배가 공연을 준비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선배가 공연하는 무대를 꾸미고 선배의 의상을 직접 챙기는 건 더없는 기쁨이었다.


그런데 공연 당일인 오늘, 선배가 상처 난 얼굴로 나타났다. 오른쪽 이마에 길게 난 상처는 화장으로도 가려지지 않았다. 그대로 무대에 서면 관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눈에 띄는 상처였다. 결국 소품을 담당하는 지우가 공연을 한 시간 남겨두고 학교를 나섰다.


‘모자 가게?’


지우는 입간판을 보고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건물을 아래위로 훑었지만 모자 가게로 보이는 곳은 없었다. 이제 와 다른 가게를 찾을 자신도 없어 일단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입간판에 적힌 대로 501호를 향해 오르다보니 철문이 나왔다.

조심스레 철문을 통과하자 낡은 건물이 나타났다. 주저 말고 들어오라는 듯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지우 또래로 보이는 점원이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일으켰다.


“어서 오세요.”


지우는 모자가 빼곡한 진열대를 발견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으로 다가갔다.

여러 모자를 비교하고 따질 여유는 없었다. 지우의 눈길은 줄곧 한쪽만 향했다. 짙은 회색의 비니스타일 모자였다. 볼륨감이 있어 승호선배의 얼굴에 딱 어울릴 디자인이었다. 잘 늘어나는 부드러운 울 소재라 이마의 상처를 가리기에도 좋아보였다. 챙이 없어 선배의 얼굴을 가릴 일이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이걸로 주세요.”


지우는 한손에 모자를 들고 다른 한손으로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얼마에요?”


마음이 급했다. 갖고 있는 돈이 모자라면 내일 와서 내겠다 말하려고 돈 대신 맡길 학생증도 미리 꺼냈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11분이었다.


“잠시 앉으시겠어요? 모자에 대해 안내드릴게요.”

“제가 좀 급해서요. 가격만 알려주세요. 얼마죠?”


안내라고 해봐야 드라이클리닝을 하라거나 건조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정도일 텐데, 지우에게는 그런 뻔한 얘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사이 또 1분이 흘러 남은 시간은 10분이었다.


“지금은 테스트 기간이에요.”


테스트 기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지우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화장품가게 앞에서 나눠주는 무료샘플이었다. 지금 쓰는 생리대도 하굣길에 공짜로 받은 샘플을 써 보고는 마음에 들어서 인터넷으로 추가 주문한 제품이었다.


“테스트 기간이라면 돈을 안 받는다는 말인가요?”


급한 마음이 대답을 재촉하는 듯한 말투가 나왔다. 다행히 점원은 지우의 말투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네. 하지만 먼저 알아두셔야 할......”


점원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이었다. 


“와,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지우는 기다렸다는 듯 점원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할 말이 남은 듯 점원이 가게 밖까지 쫓아 나왔지만 이미 지우가 철문 뒤로 사라진 후였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9분. 지우는 지금부터 멈추지 않고 내달려도 제시간에 도착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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