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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Apr 23. 2016

쓰지 못하는 우산

큰 우산이 무거워진 너와 나

"큰 걸로 주세요"

어렸을 때 나는 이 말을 달고 살았어.

문구점에서 필통을 살 때도 

엄마 심부름으로 과일을 사러 갔을 때도.

뭐든 크면 더 잘 산 기분이 들었거든.

뭐든 큰 게 더 좋은 줄 알았고, 실제로도 그랬어.


옷도 큰 게 좋아서 

긴소매를 접어서 입고 다녔어.

처음부터 큰 걸 사면 더 오래 입을 수 있으니까. 

예쁜 옷을 샀는데, 금방 몸이 자라서 얼마 입지 못하면 속상하잖아.

크면 클수록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생각을

나는 그때부터 느꼈던가봐.


너를 만나서 내가 처음으로 사야겠다고 마음먹은 물건이 있었어.

네가 내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던 날 기억나?

그때 우린 서로 얼굴만 아는, 말은 나눠 본 적 없는 사이였는데.


물에 빠진 생쥐가 될 내가 안돼 보였는지

친절함이 몸에 밴 건지

멋있어 보이고 싶었던 건지.     


회사 1층에서 장대같이 떨어지는 비를 

하염없이 보고 있는 내게 그러더라고.

"저는 차를 가지고 와서...

집에 어떻게 가세요?"


비가 많이 오는 거 같다고. 그런 거 같다고.

저 대화를 끝으로 어색한 침묵도

비처럼 우리 위에 내려앉았던 거 같아.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사라지는 너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는데 

손잡이를 잡지 않았던 팔이 다 젖어 있는 거야.


서로 몸이 닿기라도 할까, 자꾸 우산 밖으로 나가려는 나를

말없이 우산 속으로 넣어주기 위해서.

작은 우산을 최대한 내쪽으로 기울였구나.


멀어지는 너를 보면서

참 미안하고 고마웠는데,

그러다 나는 엉뚱한 생각에 빠졌어. 



언젠가 비 오는 날 같이 걸을 사람을 위해

우산을 하나 사야겠다고.

얼마 있다 나는 진짜 우산을 사러 갔었어. 

아주 크고 긴 빨간 장우산을 골랐지.


아마도 너는 본 적이 없을 거야.

널 만날 때면 유난히 날이 좋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엔 내가 깜빡했으니까.


근데 어쩌면 나는 깜빡하고 챙기지 않은 게 아닐지 몰라.

무겁고 불편해서, 늘 가방 속에 들어가는

작고 가벼운 걸 택했는지 몰라. 


같은 우산을 쓴다는 건 

내 마음에 너를 들이는 일과 같더라. 


처음에는 나를 향해 기울여준 만큼만

너를 좋아할 거 같았는데.

너를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더니

나는 큰 우산이 돼버렸어.


네가 나를 속상하게 했던 일, 화나게 했던 일, 외롭게 했던 일.

모두 작은 빗방울이 되어 나를 타고 흘렀어.


나는 그 큰 우산에 너를 담고 나를 담아서

오랫동안 걸어가고 싶었어.


어두운 날에도 눈에 잘 띄어서

언제든 우리가 걸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하고 싶었어.


우산 가득 내 마음과 내 시간을 채우면

폭우가 쏟아져도 누구의 어깨도 젓지 않을 줄 알았어.



근처에 도착하면 연락한다던 네가 

갑자기 중요한 약속이 생겼다고 했던 날.


몇 시간 동안 화장하고 머리하고 옷 입고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멕이 탁 풀려버린 거 같아.

팽팽한 고무줄을 놓았을 때처럼.

그래서 그대로 스르르 낮잠에 빠져버렸어. 


일어나 보니 늦은 밤이었고

너한테 걸려온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걱정했다면서 잠깐이라도 얼굴 보자고,

집 앞이라 그러길래 신나서 거울만 한번 보고 나갔거든.

날 보더니 너는 그러더라.


"이렇게 꾸몄으면 친구라도 만나지 그랬어.

너 좋아하는 쇼핑이라도 하러 가지.

왜 하루를 나 때문에 버려.

너는 너 할거 하다가

나는 나 할거 하다가 만나면 안 돼?

미안하다는 말도 이젠 못 하겠어.

오늘 내 앞에 너는 참 예쁜데,

너무 예뻐서 난 부담이 되려고 해."


짐같이 느껴지는 것들은 놓기 쉬워.

신경 쓰지 않으면 금방 잃어버려.

그래서 늘 손이 많이 가고,

잃어버려도 사라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어.

운이 좋으면 주인이 찾아가니까. 


예쁜데 부담스러운 그 우산이 나도 이젠 숨이 막혀.

네가 날 보면서 그랬던 것처럼.



오후 늦게 비가 온다던데,

챙길까 말까 갈팡질팡 고민하다

신발장 옆에 놓인 장우산을 흘긋 쳐다보고는

결국 나는 집지 못해.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진다는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을 고를 거면서도 

매번 여전하게 멈칫거려.


책상 서랍 속에 있던 

3단 우산을 꺼내 가방에 넣고 

네가 바래다준 그 정류장에서 나는 내릴 거야.


한 우산 아래 서있고 싶었던 마음은 같잖아.

서로 다른 우산을 원했을 뿐.


방식이 달랐다고 우리가 사랑했던 시간까지 

불편해 하진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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