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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Nov 08. 2016

제목이 할 수 없는 일

좋은 음악 하나가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대학교 3학년 때 지역 신문사로 견학을 간 적이 있다. 신문방송학이라는 학과 특성상 커리큘럼 안에 다양한

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현장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세 차례에 걸쳐 서로 다른 지역의 신문사를 방문했었다. 출범 배경에서부터 조직구조, 운영상황, 그간의 활동 내용 등등. 정갈하고 익숙한 프레젠테이션을 감상하면서 유독 한 곳의 신문사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학생들의 자세가 퍽 지루해 보였는지 발행인께서는 재미있는 제안을 하셨다. 


무기명으로 제목을 적어 내면 어떤 사람이 그 제목을 지었는지 맞춰보겠다는 것. 다년간의 내공으로 제목만으로 지은이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최근에 발행했던 실제 기사 하나의 제목과 부제목을 지운채로 프린트해 나눠 주셨다. 기사 내용은 날씨에 관련된 거였다. 정확하게 기억하진 못하지만, 그 해 겨울 최고조 한파 예상이 주 골자였고, 그로 인해 염려될 교통체증 및 사고에 유의하란 내용이었다. 비슷비슷한 제목들이었지만 똑같은 제목은 하나도 없었다. 


'영하 17도'라는 객관적인 수치를 거론하거나 '꽁꽁' '펑펑' 같은 의성어ㆍ의태어를 사용한 친구, 감기를 조심하란 말을 적은 친구도 있었다. 신문 원론의 첫 장엔 뉴스가 지녀야 할 가치에 대해서 나온다. 시의성, 영향성, 근접성, 저명성, 인간적 흥미성, 갈등성. 아마도 우리는 그곳에 적힌 여섯 가지 뉴스가치에 의거해서 제목을 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아무리 정해진 원칙에 따라 기사를 써도 거기엔 사람이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특히나 집약적인 내용을 담아야 하는 제목엔 한 사람의 판단과 선택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거라고.  



"보이지 않는 것을 썼네요" 지각 걱정이란 표현을 적었던 나에겐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것 같다는 근거 없는 과찬을 내려주셨다. 사실 나는 살짝 소름이 돋았던 거 같다. 틀렸으면 안 되는데, 엉뚱한 걸 짚은 건 아닐까, 내심 그런 걱정만 했으니까. 기사의 얼굴인 제목. 커진 글씨 크기만큼이나 책임감도 막중하다. 한 줄만으로 전체를 예상 가능하게 만들어야 하며 읽고 싶게도 해야 한다. 중요한 걸 적어야 된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중요한 걸 적고 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답을 맞히는 것과 정답을 만드는 것의 차이. 그때까지 나는 그 차이를 모르고 있었다. 제목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든 기사란 아이의 얼굴. 그곳엔 어쩔 수 없이 내가 들어가 있다. 핵심이 되는 단어를 짚어 적절한 곳에 배치하고 절묘한 비유를 섞어내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부는 취해지고 일부는 버려졌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들은 한 기사에서 내가 중요시 여기는 가치이자 더불어 '꼭 읽게 하겠다'는 당돌한 의지의 표현이다.


그 뒤부터였을까. 대수롭지 않게 제출하던 리포트와 짧은 감상문의 제목조차 수십 번의 끄적거림을 반복했다. 한 줄의 제목으로 누군가 나를 꿰뚫어 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늘 마지막에 내 발목을 붙잡았고, 만에 하나 이 한 줄로 나를 단정 짓는다면 '이건 내가 아니라고, 이건 나일 수 없다'라고 꽤나 억울한 듯 항변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과제를 질질 끄는 나를 보던 친구 하나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피곤한 타입이라며, 끌끌 혀를 찼지만 한번 품게 된 무서운 깨달음은 꼬리표처럼 나를 쫓았다.



짧은 기자생활에서도 제목 짓기는 참 중요하고 어려웠다. 뭐든 어려운 신참에게는 더욱 그랬다. 1차로 기사를 써놓고 승인을 기다리면 편집장의 검토와 수정 끝에 2차로 가공된 기사가 공식적으로 발행된다. 이 과정에서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교정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추가되는 날이면 암묵적인 혼쭐이 나서 자괴감에 휩싸였다. 승인이 끝난 내 기사에서 '…충격, 경악' 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또 다른 무서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됐다. 그토록 자극적인 말들이 헤드라인에 쓰이는 이유, 제목을 보고 클릭했다가 전혀 다른 내용을 보고 '낚였다'는 반응이 댓글에 많은 이유 말이다. 


온라인 신문은 '첫눈에 싸움'이 더없이 중요하다. 종이신문처럼 앞장으로 돌아가 볼 수도 없고, TV 방송처럼 간편한 몰입도도 가지지 못한 이상 한 페이지에, 한 줄에 모든 걸 걸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기사일 지라도 최초의 '클릭'을 불러오지 못하면 그냥 묻히고 말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슈에 대한 수많은 기사들 중 많은 사람들의 선택을 받는 건 아마도 까만 하늘에 별을 찾는 일일 것이다. 어두운 가운데 반짝이는 곳에 눈길을 두는 것. 비슷한 기사들 속에서 쉽게 반짝이는 것들은 조금이라도 구별점이 있는 흥미를 끌어당기는 제목을 가졌을 확률이 높다. 

<이소라 7집> 트랙리스트


그런데 아니었다. 아닌 것도 있었다. 

이소라의 노래가 그랬다. 이소라의 7집은 제목이 없다. 가사집을 열어보면 노래의 순서대로 제목 대신 서로 다른 조그만 그림이 그려져 있어서 어느 한곡을 특정해서 지칭하기가 어렵다. 라디오에선 그녀의 노래를 소개하다가 당황한 DJ들이 속출하기도 했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자신이 느끼는 대로 다양한 제목을 붙였으면 좋겠다는 것이 앨범의 테마였기에, 일반적으로는 '몇 번 트랙' 또는 'Track x'로 부르거나 표기하고 있다. 그중에서 track3. 막대 없는 붉은 회오리 사탕이 그려진 세 번째 곡을 나는 가장 좋아한다.


이곡을 알게 된 건 한 다큐멘터리에서였다. 이 음악은 그저 영상과 자막에 어울리는 bgm(배경음악) 일 뿐이었지만, 화면을 보는 내내 너무 좋아서 귀에 들리는 가사를 외웠다가 검색으로 찾게 된 곡이었다. 2008년에 발매된, 이렇게나 아름다운 노래를 한참이나 지나서 알게 된 것에, 나는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만약 제목이 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지 않았을까, 그럼 나는 좀 더 일찍 이 노래를 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제목이 없어서 명곡이 묻힌 건 아닐까.


책을 고르고 그림을 감상할 때 우리는 대부분 제목을 먼저 본다. 책의 알맹이는 꺼내 보기도 전에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선을 거두고, 작가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알 수 없을 땐 제목에 의지해 작품의 해석을 끼워 맞춘다. 창작물과 제목은 이렇게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존재여서, 숱하게 나는 제목으로 많은 것들을 고르며 살아왔다. 하지만 제목이 갖는 가장 큰 의의인 대표성에 의해 나는 또 많은 걸 놓쳤을지 모른다. 일부를 전부로 오해하고 본질을 엉뚱하게 호도했는지 모른다.


중요해서 어려웠던 제목 탓을 하다 문득 음악이란 게 참 위대한 것이구나 싶었다. 좋은 음악 하나가 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 제목은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 귀로 아름다운 선율을 감상하는 건 껍질 없는 과일을 먹는 기분과 닮아있다. 겉은 딱딱한데 속은 말랑하고 겉은 화려한데 속은 비어있는. 그런 이질적이고 속은 기분은 속도 겉도 하나인 과일을 먹을 땐 들지 않는다. 제목을 읊어주고 시작하는 음악이 없듯이, 첫 멜로디가 귀를 감싸는 순간부터 그 음악의 본모습은 시작이다. 


노래를 듣듯 모든 걸 알아가고 싶다. 껍질 없이, 포장지 없이, 선입견 없이.

제목에 매몰된 채 놓쳐버린 내면의 이야기들을 이제는 하나씩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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