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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m possible Apr 22. 2016

적지 않으면 나는 없어진다

오늘을 쓰는 이유

책상 위에 놓인 탁상달력을 보다가 

지나간 달을 앞으로 오도록 넘겨본다.

친구 생일이었고, 심야 영화를 봤었고, 운동화 사는데 얼마를 썼고...


네모칸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달이 있는가 하면, 어느 달은 빈 구멍이 듬성듬성 보이고,

아주 깨끗해서 한 장 전체가 큰 구멍처럼 느껴지는 달도 있다.  





한 칸 한 칸 눈을 맞춰 보면 그날 누구와 어디를 갔었구나 새록새록 기억이 나는데, 

숫자만 덩그러니 적혀있는 칸에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날에도 나는 밥을 먹고, 걸었고, 들었고, 느꼈을 텐데. 

그날에도 나는 열심히 살았는데, 없어졌다. 달력에서도 내 머리에서도.


어느 단막극에서였다.

몇 년째 공무원 시험에서 떨어지는 고시생에게 갑자기 나타난 한 소녀가 묻는다. 

여태까지 뭐하고 살았느냐고. 대학교 다니고 군대 갔다 오고 취업 준비하고, 

그냥저냥 살았다는 대답에 소녀는 그렇게 말하면 별로 한 게 없어 보이지 않냐고 대꾸한다.

나에게 누군가 그렇게 물었대도 내 대답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군대가 빠지니

내가 살아온 나날은 더 약소한 문장이 된다.

 

"그렇게 뭉뚱그려서 얘기하면 아저씨 인생이 화내요. 

내가 그거밖에 안 되느냐고. 

디테일하게 기억해야 사는 게 덜 억울하더라고요."


굳이 뭉뚱그리려고 한건 아닌데, 말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실체가 있어야 하고, 

시작하고 부서진 것들 말고, 처음과 끝이 동시에 담긴 결과물을 얘기하려 하니 아저씨도 그렇게

말할 수 밖에는 없었을 텐데. 애석하게 그의 말에 마음이 동하였다가, 반토막 난 채로 포장된 

인생 덩어리가 떠올라 '뭉뚱그리다'는 표현에 싸늘함을 느꼈다.


이름, 나이, 13자리 주민등록번호, 11자리 휴대폰 번호

망설임 없이 말하고 적는 나에 대한 것들.

이것들 뿐이라면 나는 참 억울할 거 같다. 

하지만 남들에게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나에 대한 것들은 억울해도 저것들 뿐일지도 모르겠다.

한참을 생각해야 말할 수 있는 건 나부터 신뢰하기 어렵단 거니까. 


역사를 기록했던 가장 큰 이유는 남기기 위해서였다. 잘 보관해서 과거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남겨진 이들이 살아가는 동안 현재에서, 미래에서 언제든 비춰볼 수 있도록 말이다.

오늘을 쓰는 이유도 내 역사를 남기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서, 

노력만큼 결과가 알아주지 않는 일도 많아서,

잊지 않으려 애써도 시간의 흐름은 모든 걸 무디게 만들어서.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기억하는 만큼만 살았다 가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나의 살아냄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중요하다. 

스티브 잡스처럼 우주에 흔적을 남기진 못하더라도, 내 삶의 흔적은 종이에 남겨야겠다는 생각.


아무것도 한 게 없진 않으니까, 우리는 살았으니까, 오늘도 열심히.

그래서 써야겠다, 오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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