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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식 Sep 08. 2018

데카르트를 생각하는 주말(2)

저번 주에 이어서 계속 


4부. Proof of God and the Soul 또는 Foundations of the Metaphysics 

(신과 영혼의 증명) 또는 (형이상학의 토대)


데카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이제 오직 진리 탐구에 전념하려고 하므로, 앞에서 했던 것과는 반대로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전적으로 거짓된 것으로 간주하여 던져 버리고, 이렇게 한 후에도 전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내 신념 속에 남아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방법적 회의의 출발이다. 데카르트는 잘못된 생각이나 잘못된 모든 것은 거짓이나 혹은 꿈으로부터 출발한다.(Everything and every thought becomes false and illusory)라고 이야기한다.


데카르트의 꿈의 가설은 놀랍게도 동양의 장자가 말한 꿈과 너무나 닮아 있다. 데카르트는 꿈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내가 감각하는 사물들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혹시 이것들이 상상의 산물은 아닌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 감각을 넘어서 물리적 대상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길은 없다.”


동양의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昔者莊周夢爲胡蝶(석자장주몽위호접) : 언젠가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어 

栩栩然胡蝶也(허허연호접야) :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自喩適志與(자유적지여) :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不知周也(부지주야) :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俄然覺(아연각) : 그러다가 문득 잠에서 깨어나 보니 

則蘧蘧然周也(칙거거연주야) : 자신이 분명히 누워 있는 것이 장주였다네.

不知周之夢爲胡蝶(부지주지몽위호접) : 그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胡蝶之夢爲周與(호접지몽위주여) : 나비가 꿈에 그가 된 것인지 몰랐다네. 


데카르트와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나 데카르트는 여기서 또 다른 방향으로 진전한다. 즉 꿈을 거짓의 범주로 묶고 그 범주의 모든 것을 회의(의심)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버린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동양의 장자와 결별하는데 모호함을 유지하는 장자적 꿈은 현재에도 여전히 모호한 상태로 우리에게 남아 있지만 데카르트는 이 모호함을 끝내 분석하고 분류해 낸다.(그것이 옳든 또는 틀리는 문제는 논외로 한다.)


그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에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은 잠들어 있을 때에도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이때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정신 속에 들어온 것 중에서 내 꿈의 환영보다 더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반드시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존재가 하나의 꿈일 수 있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인격적 자아, 신체적 주체, 몸과 마음의 결합체가 아닌 생각의 주체라는 점에서 반성 능력과 내적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회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데카르트는 판단한다. 여기서 신의 문제가 등장한다. 즉 회의의 대상이 아닌 ‘나’라는 부분을(반성 능력과 내적 능력을 가진) 그는 ‘관념’이라고 상정하는데 결국 이 ‘관념’이 신적인 것이라고 데카르트는 분석한다.


5부. Physics, the heart, and the soul of man and animals
(물리학, 심장,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영혼)


5부에서 데카르트는 자연현상의 원인과 그 과정, 그리고 인간과 동물의 영혼 등에 대해 기독교적 사고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성서적 신비주의에 입각한 설명이 아니라 과학적 합리적 체계에 의한 설명으로서 다양한 증명과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하느님(God, 불어 Dieu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주를 지칭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그렇게 추론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일 뿐이다. 여기서는 그래서 하나님 대신 하느님으로 표기하도록 한다. 하나님으로 된 책도 많다.)이 상상적 공간 속에 어디엔가 지금 한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기에 충분한 물질을 창조하고 그가 세운 법칙을 따라 자연이 움직이게 한다고 먼저 가정한다. (창조론에 입각한 논리적 전제이자 懷疑의 최종단계에 필요한 근거이기도 하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바로 이렇게 상정한 새로운 세계에서 일어날 것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사고의 확장을 막는 동시에 비 기독교적인 논리의 침입을 사전에 제한하고자 하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하느님과 정신에 관하여 말한 것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묘사하려고 했고, 하느님의 무한한 완전성으로부터 증명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과 하느님이 여러 세계를 창조했어도 그 법칙은 동일하게 지켜지는 것임을 밝히려고 했다. 또한 혼돈 상태의 물질을 통해서 어떻게 하늘이 만들어지는지, 어떻게 지구가 형성되고, 항성들과 빛이 만들어지는지도 설명하려 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에 매우 정교한 수학적이며 기하학적인 원리가 있음을 주목한다. 즉 모든 동물(인간을 포함한)을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자연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몇 가지 질문들을 상정하는데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1. 신체의 부분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신체의 신경들과 근육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하며 그러한 힘의 근원은 신이 인간에게만 부여한 관념(불어 Penser, 영어 Idea+Soul)인가? 과연 그것이 관념이라면,

2. 이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터전(장소, 혹은 기착지)인 공통 감각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3. 또 관념들을 보존하는 기억이란 어떤 것인가? 

4. 그리고 자연의 원숭이와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기계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자연의 인간과 그것을 흉내 내는 기계(역시 가정한다면)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는가? 


데카르트는 이 문제에 대하여 기계론적 자연관에 따르면서 이성의 문제를 따로 분리해낸다. 이성은 결코 물질로부터 유래될 수 없는 특별하게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리고 이성은 인간의 감각과 욕망을 지배하며 진정한 인간을 형성하는 데는 매우 다양하고 정교한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다.


방법서설 전체에서 논리적인 서술의 전개가 미약한 부분이 이 장이다. 자연과학과 신학의 교점에 대한 혼돈과 두려움이 아마도 이러한 내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더불어 천재가 아닌 인간 데카르트의 고민이 엿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6부. he explains that for these reasons he has been slow to publish

(집필의 이유)


데카르트는 책을 쓰면서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논리를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자연(5부에서 말한 기계론적 자연관)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 원리를 획득하고 그것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 그것들을 자신 속에 숨겨둘 수 없고, 만일 숨겨둔다면 격률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약 자신의 단명이나 다양한 실험의 부족에 의하여 방해를 받는다면 비록 데카르트 자신이 발견한 내용이 극히 적을지라도 그 전부를 충실하게 대중에게 알리고, 우수한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연구하게 하여 많은 사람들의 업적을 누적함으로써  각자가 따로따로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함께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판단하였다.


실험에 관하여 그가 지킨 원칙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그는 세계 안에 있는 혹은 있을 수 있는 모든 것의 원리들 중 가장 선험적인 원리를 찾으려 하였고,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느님을 중심으로 고찰하여 우리의 마음속에 본래부터 있는 진리의 씨앗으로부터만 끌어내려고 노력했다. 


둘째로, 그는 그 원인들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과가 무엇인가를 면밀하게 살펴보았다. 하늘, 별, 빛, 지구 등의 대상은 그 결과였고, 좀 더 특수한 것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했을 때는 갖가지 특수한 실험들이 요구되었다. 


셋째로, 모든 대상 에로 자신의 정신을 돌이켜 다시 훑어보았는데, 그는 발견한 여러 원리를 가지고서도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고백한다.


'방법서설'은 주체적 자아의식으로서 이성을 강조한 근대철학의 시작점에 위치한다. 고대 철학이 원리 탐구를 중심으로 개별 항들의 관계 사이에서 법칙을 탐구하는 방식이었다면 데카르트의 철학은 그 개별 항의 ‘무엇’에서 개별 항들이 ‘어떻게’의(회의와 반성, 적용과 탐구) 방식으로 사유를 전환한 획기적이고 기념비적인 시도였다. 


또한 수학에서 지금도 사용되는 직교좌표 등 해석 기하학의 시초가 되어, 향후 미적분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리고 동물 기계론은 행동 심리학, 인지발달 심리학에 영향을 주고, 근세 자연과학적 방법론의 기초가 되었다. 


데카르트 당대에만 해도 아직까지 스콜라 철학이 지배적이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성에 의한 반성적, 논증적 사고는 매우 위험한 학문 방법이거나 혹은 가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그의 합리주의 사상은 자연과 인간의 분리를 통해(물론 여전히 기독교적 교조주의의 향기가 진하지만) 전통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을 기계론적 세계관으로 전환시켰다. 이는 과학 문명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지만, 인간에 의한 자연 정복의 기초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후세 생태학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끝맺으며


데카르트의 진리 탐구 방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에서 명증 하게 인식하지 않은 것은 하나라도 진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내용에서는 데카르트의 예리하고도 비판적인 관점을 느낄 수 있다.


두 번째 방법에서는 검토대상을 가능한 한 부분들로 필요한 만큼 나누라는 것에 대한 내용이다. 즉 세분화시켜서 각 부분들을 명확한 지식들로 구축하라는 내용이다.


세 번째의 가장 단순하고 쉬운 것부터 인식을 시작하는 것에서는 체계적인 순서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 순서를 마련해야 올바른 과학적 추론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완전한 열거와 검토를 통해서 신뢰 가능한 지식이 습득될 때까지 점검하는 것이다. 이 원칙에는 데카르트의 자신감이 많이 반영되어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방법을 발견한 근대인의 자신감이다.


논리적 혼선과 여전히 신 중심의 사고 등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매우 위대한 근대적 저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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