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학교와 나 02화

그래도 철학수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by 김준식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정점에 서 있었던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고리오 영감(Le Père Goriot)』에는 요즘 흔히 회자되는 ‘수저론’의 시초가 등장한다. 고리오 영감 외에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라스치냐크가(요즘으로 말하자면 흙수저이거나 아예 거기에 끼지도 못하는 신분의 청년) 파리에서 성공을 위해 혼신을 다해 공부하고 노력한다. 이것을 본 고리오 영감은 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죽기 살기로 일해서 버는 노동 소득보다 자산 소득으로 먹고사는 것이 훨씬 풍족하다.”


대한민국의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는 거의 자본이 모든 것을 흡수한 시공간이다. 집을 사고팔아 돈을 벌고, 땅을 사고팔아 돈을 벌며, 주식을 사고팔아 또 돈을 번다. 반대로 그 과정에서 망하는 사람도 비슷하게 있다. 경제적 상황의 종점은 늘 제로섬 아닌가! 영혼을 끌어서 뭔가를 사고팔아야만 자산 소득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위 소설의 고리오 영감 말처럼 더 풍족해질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은 사실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중학교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는 나는 중학생들에게 ‘행복’을 강조한다. ‘행복’만큼 다양한 정의를 가진 단어도 별로 없다. 지수중학교의 교육이 바라보는 곳은 ‘행복한 삶’이다. 그 ‘행복한 삶’을 가꾸기 위해 중학생들에게 어려운 일인 줄 알면서도 철학을 수업한다. ‘행복’은 위에서 말한 무언가를 사고팔아 생기는 자본의 축적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본은 너무나 깊숙하게 우리 삶에 개입되어 있고, 중학생 역시 그 세상에 발을 딛고 서 있다. 자본을 추구하는 것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의 방향을 오로지 자본이 설계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제시한 방향이 바로 ‘행복’한 삶이다. 자본의 세상에 이미 발 딛고 있으면서 ‘행복’이라는 삶의 지향점으로 나아가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과 외부와의 균형이다.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드센 외부의 힘으로부터 자신을 유지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 내부의 힘은 내부의 단단한 구조로부터 비롯된다. 내부의 단단한 구조는 자신의 삶의 방향과 스스로의 의지를 적절히 조절함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내적 작용의 근본 에너지를 제공해 주는 것이 어쩌면 철학적 소양일 것이라는 희미한 희망을 걸고 나는, 오늘도 중학생을 대상으로 철학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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