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같은 이야기
이 책의 시작을 알리며 출근했던 K 차장. 하루 종일 바쁘게 업무를 하다 보니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평소라면 회사에서 동료들과 저녁까지 먹고 야근을 했겠지만 K차장은 주변 눈치를 살피며 짐을 챙겼다.
이 달의 말일이었기 때문이다. 회사는 월말 마감 등으로 바쁘지만 K차장은 개인적으로도 바빴다. 그는 매월 말일이면 카드 실적을 확인하고, 부족한 카드실적을 채워 넣고 있었다. 30만 원을 써야 다음 달에 1만 원 정도 캐시백을 해 주는 카드가 많다. K차장은 항상 카드를 딱딱 30만 원씩 맞춰서 쓰고 있었다. 혹시 30만 원을 채우지 못한 카드가 있다면 월말에 다 확인하고 정확히 채웠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체리피커가 그였다.
동료들이 뭘 그렇게까지 카드 실적을 챙기냐고 핀잔을 주면 K차장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아휴 부장님, 월급쟁이가 뭐 다른 수가 있어야 말이죠. 한 푼이 아쉽지 않나요? 이거 안 하면 저도 배달알바나 대리운전 뛰어야 할 판입니다."
B부장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K차장을 쳐다보았다.
"아니 K차장, 자네 월급에 무슨 대리며 배달이야. 자네 정도면 대한민국 상위그룹일 텐데, 거 너무 돈돈 하는 거 아닌가?"
"아, 부장님.. 제가 아들이 둘이잖아요. 학원비가 만만치 않아요. 외벌이로는 너무 힘듭니다. 이 코스 지나셨으니 아시잖아요"
B부장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학원비. 그렇다면 인정이지. 인정.. 지금 초등 둘이지? 영유는 보냈나?"
"아뇨, 그때 못한 거 영어학원에 다 바치고 있는 중입니다.. 솔직히 뭐 하는 건지 저도 잘 모르겠어요. 부장님은 좀 어떠세요. 막내가 고3이시잖아요"
K차장은 결혼을 늦게 한 편이었고, B부장은 K차장보다 나이가 있지만 결혼을 일찍 했다. 첫째는 대학생이고 둘째는 고3이었다. K차장은 자신은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B부장이 부러웠다.
"말도 마. 죽을 것 같아. 고등학생 한 달 학원비가 500 이라네. 큰 놈은 재수까지 했었어. 계산이 돼? 내가 왜 아직도 소나타 타는지 알아? 학원비 다 모았으면 차를 사도 몇 대를... 하.. 말을 말아야지."
대기업을 25년 다닌 B부장도 소나타를 타는데 내가 뭐라고 GV80을 넘보나. K차장은 숙연해졌다. B부장은 두 아이 모두를 대치동 톱클래스 학원에 보냈다. 학원은 정직한 시장경제라고 B부장은 늘 말했다. 돈을 들인 만큼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었다. K차장은 자신도 애 둘을 대치동 학원에 보내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아이 1명당 학원비 1.8억. 둘이니 3.6억이다. 평촌에서 대치동 라이딩은 너무 멀다. 근처에 전셋집이라도 구해야 할 텐데. 도무지 답이 나오지 않았다. 큰 놈이 초5이니 아직 4년 남았다. 그 안에 로또라도 되던가 은행이라도 털어야 할 판이었다.
K차장은 난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B부장에게 퇴근인사를 건넸다. B부장은 야근할 모양이다. 자식이 고등학생인 회사 고참들 대다수가 점심, 저녁을 모두 회사에서 해결했다. 야근수당을 받으려고 야근을 자처하는 사람도 많았다. 어릴 때는 지독히 회사를 사랑하는 고참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이제 K차장은 그들을 이해했다. K차장이 다니는 회사 급여는 대한민국 평균 대비 상당히 높았다. 그러나 서울 집값과 사교육비를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꽤 많은 급여를 받아도 한 끼에 5,000원짜리 회사밥을 먹는다. 자식이 명문대에 갈수만 있다면 이 정도쯤이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회사밥이 군대에서 먹던 밥과 비교하면 훨씬 좋다. 그러니 버틸만하다. 나만 버티면 가족이 행복하다. 이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K차장은 퇴근길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출근때와 정확히 역순이지만 퇴근길 지하철은 확실히 빠르게 느껴졌다. 가족이 기다리기 때문일까. 아니 회사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인 것 같다. K차장은 지루한 지하철 안에서 이번달에 다 채우지 못한 카드를 생각했다. A카드 32,100원, B카드 22,000원, C카드 15,000원. 얼른 처리해야지. 딱딱 맞춰서 30만 원을 만들 때마다 K차장은 국민학교 때 오락실에서 접한 테트리스를 떠올렸다. 정확히 30만 원을 채워서 1만 원을 받을 때의 느낌은 테트리스 할 때의 그 느낌이었다.
K차장이 평촌역에서 내려서 이동한 곳은 평촌 학원가였다. K차장은 늘 학원비를 말일에 결제했다. 실적을 채우지 못한 카드가 있으면 채우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결제를 지원하는 학원이 늘고 있지만 여러 장의 카드 소액 결제를 온라인으로 지원하는 학원은 없었다. 그래서 K차장은 번거롭더라도 말일이면 늘 학원을 방문했다. 학원 3곳에서 150만 원 정도 결제를 해야 하니 결제 금액이 모자라서 실적을 못 채울 일은 없었다.
K차장에게 학원가는 늘 낯설고 기이한 풍경이었다. 색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넓은 도로를 가득 메우고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다. 아이들 답게 밝고 해맑게 웃고 있지만 방금 전까지 보고 온 야근하는 직장인의 모습과 어딘가 비슷했다. K차장은 퇴근길이었지만 이 아이들은 일종의 출근길이었다. K차장의 아이가 다니는 수학학원은 초등학생은 18시부터 22시까지, 4시간 동안 수업을 한다. 중, 고등학생들은 더 늦게 끝나는 곳도 많았다. 그리고 집에 가는 게 아니라 독서실에서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간다고 했다. 직장인들은 주 52시간 근로가 법으로 정해지며 야근이 많이 없어졌는데 초등학생이 이러고 있는 현실은 너무 이상했다.
아이들 사이를 지나 수학학원에 도착한 K차장은 데스크 직원에게 목례를 했다. 직원은 통화 중이었다. 학부모에게 무언가 설명 중이었는데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직원은 전화를 끊고 K차장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결제하러 오셨나요?"
"네, 안녕하세요. 마린 초등학교 5학년 A군 결제입니다. 이번달이 얼마죠?"
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네 아버님, 셔틀비 3만 원, 교재비 10만 원, 수업료 40만 원 해서.. 53만 원입니다. 일시불로 하시겠어요?"
K차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뇨, 죄송한데.. 분할 결제를 하려고 하는데요. 다른 직원분이 늘 해주셨는데.."
"아 ㅇㅇ 씨는 지난달에 퇴사하셨어요. 분할 금액 말씀해 주세요."
K차장은 주머니에서 카드 몇 장을 꺼냈다.
"이 카드는 32,100원이고요. 이 카드는..."
"잠시만요 아버님"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직원은 K차장에게 기다려 달라 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태현이요? 아.. 이번에 태현이는 레벨테스트에서 떨어졌어요. 네 어머님.. 레벨 테스트 준비 학원이 있어요. 거기를 좀 다니다 오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네.. 네.."
K차장은 잠자코 점원을 기다려 주었지만 속으로는 좀 짜증이 났다. 엄연히 결제를 하러 온 고객인데 자꾸 기다리게 하다니. 결제하는 금액도 커서 속이 쓰린데 친절하지도 않다니. 회사 근처 국밥집도 이거보단 친절한데 53만 원이면 국밥이 대체 얼마인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직원은 전화를 끊고 K차장을 바라보았다.
"네, 아버님. 얼마씩이라고요?"
"아 네, 이 카드는 32,100원이고, 이 카드는 22,000원 결제해 주세요"
"네"
직원은 짧게 답하며 카드를 받아 긁었다. 영수증이 나오자 K차장에게 필요하냐고 물었다. K차장이 불필요하다 말하자 직원은 짧은 한숨을 쉬며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음은요?"
K차장도 직장 생활할 만큼 한 터라, 눈앞의 직원이 자신 때문에 짜증이 나 있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빠 죽겠는데 한 번에 끝내지 나눠하는 것에 대한 불만표시 같았다. K차장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저기요, 내가 내 돈 내러 왔는데 결제를 나눠 하건 붙여하건 무슨 상관입니까? 학원 입장에선 나눠내나 붙여내나 카드 수수료도 똑같아요. 한 달에 50만 원씩 가져다 바치는데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K차장은 가까스로 참았다. 아이가 다니는 학원이다. 결제 진상이라고 소문이 나면 애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 K차장은 K직장인답게 만면에 웃음을 띠고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하다' 며 카드를 내밀었다.
결제를 하는 접수 데스크 옆으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학부모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K차장은 와이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학원에 들어오기 위해서 준비학원을 다니는 아이들도 많다고 했다. 명문대를 가기 위해선 수학은 어디 어디가 좋고, 영어는 어디 어디가 좋다는 정보가 엄마들 사이에서 늘 공유되고 있었다. 상담을 받고 돌아서는 엄마들의 표정은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다들 K차장과 비슷해 보였다. 속으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들지만 겉으로는 학원에 대해 극도로 친절한 모습이 희한했다. 돈을 내는 고객이 '을'이고 들어오고 싶어서 줄을 선 학원은 '갑' 그 자체였다.
대학을 가기 위해 학원을 다니는데 그 학원을 가기 위한 학원을 또 다닌다. 저렇게 해서 명문대를 졸업하고 의사, 판사, 검사가 되는 게 대한민국 최고의 루트니까 저러는 거겠지. 전문직이 안되면 최소한 대한민국 최고의 회사 삼서전자라도 가길 바라며 모두가 한 달에 몇 백씩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나만 이런 게 아니다.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이 길이 맞다...' K차장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다음 카드를 주며 100원 단위까지 맞출까 하다가 K차장은 만원 단위로 끊어서 결제했다. 내 아이를 거두어 주는 학원에 대한 조그마한 배려라고 K차장은 생각했다. 다소간 실적금액을 넘겨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
K차장은 터벅터벅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모두 학원에서 오지 않은 상태였다. 샤워를 마치고 와이프와 드라마를 보고 있으니 밤 10시 30분쯤 아이들이 귀가했다. K차장은 드라마를 마저 보려다가 회사에서 강제로 시키는 온라인 교육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사에서 시키는 교육은 켜 놓기만 해도 되니 켜 놓고 놀아야지라고 생각하며 K차장은 PC를 켰다. 교육은 'AI를 활용한 업무 자동화'였다. chat GPT, Perplexity 같은 인공지능을 써서 업무를 빨리 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었다. 켜 놓고 TV 앞으로 돌아가려던 K차장은 흥미가 생겼다. 언론에서 하도 난리여서 궁금했는데 마침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정말 똑똑했다. 어려운 수학, 과학, 코딩 문제들을 모두 척척 풀었다. 며칠 전 아들이 물었던 수학문제가 생각났다. 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인데 선행학습으로 이미 중학교 2학년 수학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30년이 넘은 K차장은 아들이 가져온 중학교 2학년 수학문제를 풀 재간이 없었다. 문제가 어려워진 것인지 자신이 바보가 된 것인지. 어쩌면 둘 다 일지도 모른다.
"아빠는 이것도 못 풀어? 대학교도 나왔잖아. "
아들의 한심하다는 얼굴에 K차장은 나름의 변명을 했다.
"아빠는 원래 수학을 못했... 아니지. A야. 아빠가 졸업한 지 오래되었는데, 회사 가면 이런 거 안 해. 수학 안 써. 아빠가 오래 안 써서 기억이 안나는 거야"
"그러면 회사에선 수학 뭘 써?"
아들은 천진난만한 얼굴로 이렇게 물었었다. K차장은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된다고 하려다가 얼버무렸다. 그다음 질문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도 안 쓰는 걸 자신은 왜 배우느냐' 하면 '대학자리는 좁은데 남들보다 네가 나은 걸 증명해야 한다'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온라인 교육 강사는 수학문제를 풀어주는 AI 시연을 보여주었다. 모르는 문제를 찍어서 업로드하면 AI가 문제를 풀어주는 것이다. 진짜로 저게 된다고? K차장은 안될 거라 생각하며 자신도 똑같이 해 보았다. 아들 방에 가서 문제집의 문제를 스마트폰 사진으로 찍었다. 인공지능에게 묻자 5초도 안되어 인공지능은 완벽한 답을 알려주었다. 상세한 풀이과정도 알려주었다. 너무 신기했다.
K차장은 아들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려 아들 방으로 가려다 멈췄다. 이렇게 하면 아들이 스마트폰을 더 보거나 컴퓨터만 더 하게 되지 않을까? 공부를 더 안 하려 할지 모른다. AI가 다 할 줄 아는데 내가 왜 해야 하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반박할 말이 없으니 그냥 아들은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K차장은 다시 돌아가 PC 앞에 앉았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 아버지는 인공지능을 배우고 초등학생 아들은 수학문제집을 풀고 있다. 미래에 인공지능을 잘 활용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저 녀석인데. 뭔가 이상한 장면이라고 K차장은 생각했다. 대한민국 여느 가정이 모두 이러고 있겠지. 드라마가 끝난 TV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삼서전자가 인공지능 개발에서 뒤처져서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창의력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뉴스는 끝났다.
K차장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