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내밀함에 대한 관음 욕구가 아니었을까?
평면도를 보면 설레인다. 초등학교 때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 끼워져 있던 아파트 분양 광고 전단지. 거기 그려진 평면도는 내 마음을 쿵쾅거리게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평면도에 소파나 싱크대가 그려져 있는데, 거기에 사람까지 더해서 넣는다고 생각해 봤더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작은 미니어처에 대한 선망이었을까? 그 설렘이 강렬해 작은 박스를 반으로 잘라 인형의 집을 만들고, 성냥갑으로 서랍장을, 과자통으로 침대를 만들었다.
누군가의 삶을 전지적인 시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에 설레었던 것일까?
십년이 지나 스무 살 때 ‘심즈’ 라는 게임을 했다. 집을 만들고 벽지부터 가구까지 내 마음대로 요리조리 배치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사람도 만들어서 가족을 설정해주고 나면, 내가 만든 집에서 요리를 하고 라디오도 눌러 춤을 춘다. 볼일도 보고 목욕도 하고 연애도 한다. 전지적 시점에 관한 욕구를 꽉 채워준 게임이다. 단점이라면 상호작용 하는 재미 말고는 엔딩이 없는 게임이라 지루해진다. 그럼 나는 이 집 저 집을 만들어 놓고 심들(심즈 안에 있는 사람 캐릭터들을 칭함)이 복잡하게 엮이게 만들어 질투심을 자극해 뺨을 맞게 한다거나, 몇일간 수영을 하면 저승사자가 나타나는지등, 다양한 심즈 안의 상호작용을 발견하는 재미로 채우기도 했다.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쇼’에서 세상 사람들이 주인공의 인생을 TV로 관람했던걸 주인공만 몰랐던 것처럼. 내가 그들을 조종하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게임도 나이를 먹어 이제는 1 시리즈 이후 19년 동안 다양한 확장팩이 추가돼 나왔다. 성격과 인생의 목표를 정한다. 그래픽은 세밀해져서 피부의 주근깨와 얼굴형, 눈썹 모양까지도 설정할 수 있게 되었다. 설정이 복잡해지자 나는 흥미를 잃었다. 아마 인형놀이 자체를 좋아했던 건 아닌 것 같고, 사람들의 내밀함이나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에 대한 관음 욕구가 아니었을까?
예능을 대부분 보지 않지만 ‘나 혼자 산다’ 만큼은 골수팬이다. 6년 전 이프로그램이 시작했을 때 몹시 설레었다. 타인의 일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이 꽤 흥미로웠다. 설정이니 말이 많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의 내밀한 공간과 생활을 본다는 건 묘하게 몰입감 있다.
어릴 때 종종 혼자 있는 나를 누군가 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가신 할머니는 내가 쓰레기를 몰래 버릴 때 생각이 났고(양심의 다른 이름이었나?) 짝사랑하던 남자아이는 얼굴을 일그러 뜨리며 힘주어 볼일을 볼 때 스치곤 했다. ‘윽 이 모습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하면서.
친구들과 농담할 때, “무슨 초능력 갖고 싶냐?” 하면, 누구는 공간이동, 누구는 하늘을 나는 능력을 이야기했는데 난 늘 투명인간을 선택했다. 내가 없을 때 하는 행동과 생각, 속마음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면서 다른 사람의 내밀함은 엿보고 싶어 했다.
결혼 전 신랑과 ‘몰래 본 카톡’으로 싸운 적이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굳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영화 ‘완벽한 타인’에서 문자 공개하는 것에 대해 겉으로는 태연하려 하지만 각자가 숨겨진 비밀을 들킬까 긴장 하는게 쫄깃했다. '그래. 사람이라면 누구나 숨기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알 필요는 없구나.'를 한번 더 깨달았다.
인간관계의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 관계는 오래간다. 가깝거나 멀리하면 관계는 타거나 냉각된다. 잘 알면서도 잘 되지 않는다. 건강한 거리유지와 대인관계에서의 전지적 시점은 내 평생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