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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Dec 06. 2018

장난의 법칙

장난은 혼자 완성할 수 없는 퍼즐과 같다.

어쩌면 내가 장난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꾸미지 않은 내가 꾸미지 않은 너와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모두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담벼락 뒤에 숨어 작당하고 있는 느낌. 
언제든 깔깔깔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 
쉿 술렁술렁 두근두근 키득키득한 그 느낌. 
짐짓 어른인 체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순식간에 
아무 걱정 없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그 느낌.
ⓒ 조성민


나는 장난, 농담을 좋아한다. 내가 하는 말에, 행동에 주변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게 좋다. 가끔 개그 욕심이 지나쳐 유치하다는 핀잔을 듣거나 적당히 하라는 제지를 당하긴 하지만 시시때때로 ‘아, 장난치고 싶어’, ‘아, 농담하고 싶어’가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걸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몸이, 입이 근질근질하다.


지적이고 우아한 글을 읽고 친구에게 “나도 이 작가처럼 글 쓰고 싶다”고 말하면 나를 아는 친구는 “넌 개그 욕심이 있어서 안 돼”라고 꽤 단호하게 말한다. 처음엔 발끈해서 ‘나라고 못 할 쏘냐!’ 전의를 불태우지만 나도 나를 아는지라 금방 친구의 말에 수긍하고 만다. 차분하게 글을 쓰다가도 ‘지금쯤 이런 농담을 던지면 재밌을 것 같은데’, ‘이 표현을 쓰면 읽는 사람이 빵 터질 거야’ 슬금슬금 개그 욕심이 고개를 쳐든다. 글도 생긴 대로 쓸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몸과 입에 더해 손가락도 근질근질한 것이다.


장난과 농담은 나의 애정표현 방식이기도 하다. 내 마음속에는 기다란 나무 막대기가 가로놓여 있다. 이런 걸 왜 만들어놓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런 게 허리 정도 오는 높이에 걸려 있다. 이 막대기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놓인 차단기처럼 방문자를 확인하고 오르락내리락한다. 당신은 들어와도 돼. 당신은 좀 기다려. 당신은 들어오지 마. 막대기는 본능과도 같아서 아무리 머리가 들여보내라는 신호를 보내도 못 들은 척 요지부동인 경우가 있고, 들여보내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주어도 멋대로 마구 문을 열어주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한다. 머리는 짐짓 근엄한 척 이성적인 척 편견을 갖고 사람을 대하지 말라고, 모든 사람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제일 친한 사람 덜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구별하지 말고 모두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잔소리를 하지만 마음속 막대기는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맘대로 하련다, 그게 되면 내가 왜 이러고 있겠니 귀를 후비적거리고만 있다. 머리와 마음의 대치 상태. 마음이 매기는 친밀도의 등급.


이 막대기를 올리고 내리는 기준이 나에게는 ‘장난’이다. 내가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 나와 함께 장난을 칠 수 있는 사람은 막대기 안쪽에, 그럴 수 없는 사람은 막대기 밖에 서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좋아하는 걸 같이하고 싶을 정도로 호감 가는 사람을 고르는 마음의 기준, 내가 좋아하는 걸 함께하며 더 좋아진 사람을 고르는 마음의 기준 같은 게 아닐까. 내가 까불어도 버릇없고 얌전치 못하다고 욕하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내 옆에 있어 줄 거란 믿음을 주는 사람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 같은 것. 머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등급을 매기는 그런 건방진 짓을 당장 그만두라고 외치지만 마음 관리사무소엔 여전히 장난이 들어앉아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버튼을 누르고 있다. 가끔 농담이 관리사무소에 놀러 오긴 하지만 농담은 어색함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처음 본 사람과도 가볍게 주고받기 때문에 친밀함을 재는 척도로 삼기엔 너무 느슨하다. 따라서 버튼의 주인은 단연 장난이다.


그냥 적당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뭐 별거 있나? 싶은 장난은 사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된다는 점에서, 감정의 변화를 끌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섬세하고 예민한 활동이다.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무턱대고 장난을 걸었다간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나를 무시하나?’ 같은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 예의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그런 오해를 하지 않을 만큼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지금 두 사람의 주변 분위기, 그날 상대방의 기분 등을 잘 살펴야 한다. 나 혼자 신나서 기분 나빠 잔뜩 찡그린 사람을 혹은 우울해서 어깨가 처진 사람을 쿡쿡 찌르면 되돌아오는 건 짜증스러운 반응뿐이다. 한두 번 받아줬다고 눈치 없이 계속 똑같은 장난을 반복하는 것 또한 화를 부르는 대표적 행동이니 장난을 치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가 하하호호 웃는 해피엔딩을 맞이하고 싶다면 분위기의 흐름을 읽는 기술, 적당한 때에 치고 빠지는 기술이 필요하다.


장난은 수고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일임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 영화 <덤앤더머> 2편을 보면 로이드(짐 캐리)가 친구 해리(제프 다니엘스)를 속이기 위해 20년 동안 환자 행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20년은 영화적 재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겠지만 현실에서도 장난에 성공하려면, 장난의 기쁨을 극대화하려면 덫을 놓고 상대가 빠지길 기다리는 깊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문 뒤에 숨어서 상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끈기, ‘생각보다 너무 안 나타나는데. 이제 그만 포기할까’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들더라도 이 사람은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끝까지 기다리는 끈기가 필요하다. 기다림이 긴 만큼 기쁨도 클지니 장난을 완성해가는 모든 순간이 손에 땀을 쥐는 긴장과 즐거움의 연속인 것이다.


장난에는 그 장난을 받아줄 좋은 동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장난은 혼자 완성할 수 없는 퍼즐과 같다. 같은 그림에서 떨어져 나온, 모양이 다른 퍼즐 조각이 함께해야 온전한 그림을 만들 수 있다. 내가 가만히 서 있는 내 뒤로 다가가 오금치기를 할 수도, 내가 걸어가는 내 뒤로 다가가 “왁!” 놀래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쿵 하면 짝 해줄 동료, 언제든 나와 함께 키득키득거릴 준비가 되어 있는 동료, 장난을 받아주고 함께 장난에 참여할 동료, 생긴 건 다르지만 같은 결에서 떨어져 나온 동료가 필요한 법이다.


마지막으로 이 장난이 어떤 마음밭에 뿌리내리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애정인지, 미움인지. 굵고 튼튼한 본 뿌리가 애정밭에 몸을 묻고 있다 하더라도 작고 약한 잔뿌리 하나가 미움밭으로 뻗어 나간 상황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장난을 치면 안 된다. 잔뿌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뻗은 뿌리를 거두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움이 섞여들면 장난이 괴롭힘으로 변질되는 건 순식간이다. 약간의 당황, 놀람만 주고 끝나야 할 장난이 고통을 주는 장난으로 나아가고 만다. 아프게 해놓고, 괴롭게 해놓고 “장난이었어” 한마디로 아픔을, 괴로움을 무마하려 해선 안 된다. “장난인데 뭘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적반하장, 상대를 나무라선 안 된다. 사람마다 고통을 느끼는 정도가 다르므로 내 마음의 상태와 상대의 마음 상태를 고루고루 살필 필요가 있다.


어쩌면 내가 장난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꾸미지 않은 내가 꾸미지 않은 너와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밀란 쿤데라의 표현을 빌리면 살아오면서 하나씩 만들어온 가면, 번듯한 사회인인 척하는 가면, 성실하고 예의 바른 인간인 척하는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순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두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담벼락 뒤에 숨어 작당하고 있는 느낌. 언제든 깔깔깔 웃을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 쉿 술렁술렁 두근두근 키득키득한 그 느낌. 짐짓 어른인 체하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순식간에 아무 걱정 없이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은 그 느낌. 그 느낌이 그렇게 좋은지도 모른다.


‘30대 후반, 15년 차 사회인, 프리랜서 교정자’의 가면을 쓰고 사무실에 나가 ‘출판사 사장, 편집자, 엄마, 아내, 며느리’라는 여러 개의 가면을 쓰고 사무실에 나온 친구와 화장실에 누가 먼저 가나 달리기 시합을 하고, 서로의 책상으로 쓰레기를 던지고, 어둑어둑한 창고에서 책을 포장하면 슬그머니 다가가 창고 문을 닫아버리는 장난을 치면서 그렇게 깔깔거리는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30대 후반, 15년 차 사회인, 프리랜서 교정자’, ‘출판사 사장, 편집자, 엄마, 아내, 며느리’가 아닌 그냥 너와 내가 되는 것이다. 숨통이 트이는 순간, 네가 가장 예쁜 순간, 아마 내가 가장 예쁠 순간이 바로 그때가 아닐까. 이제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가면을 바꿔 쓰는 게 너무나 익숙해져서 내가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아닌지도 잘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우리가 그냥 민낯을 드러내는 순간이, 그 민낯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장난의 순간이 아닐까.


어느 날 새벽녘, 세상모르고 자고 있던 내 귀에 “으어어어어!”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목소리였다. 깜짝 놀라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안방으로 달려갔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아빠는 심근경색으로 스텐트 시술을 네 번이나 받은 환자, 몸에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환자였다. 안방으로 가는 몇 초 사이에 별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안방에 들어가니 엄마가 모로 누운 아빠를 토닥이고 있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이에요? 아빠 아파요?” 다급히 묻는 내게 엄마가 조용히 속삭였다. “아냐, 아빠가 잠꼬대한 거야. 걱정하지 말고 가서 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빠에게서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잠시 안방을 서성이다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아침, 세 식구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제 아빠 왜 그런 거예요?” 내 물음에 아빠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꿈에 귀신이 나왔는데, 스멀스멀 귀신이 다가오는 게 느껴지는 거야. 아직 모습은 안 보여도 오는 게 느껴져. 그래서 문 뒤에 가 숨었어. 귀신이 오면 ‘왁!’ 놀래서 쫓아버리려고. 아니 근데 귀신이 다 왔는데 소리가 안 나오는 거야. 입만 벙긋벙긋하니까 당황스럽고 답답해 죽겠더라고. 그래서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막 소리를 지른 거지. 꿈에서 소리 지른다는 게 진짜 입으로 나온 거고.


고작 이런 꿈 때문에 새벽에 그 애를 태웠나 싶어 허탈한 마음 반, 꿈에서 그것도 귀신을 상대로 장난을 치려 한 아빠가 웃긴 마음 반. 반반의 마음이 뒤섞여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귀신을 놀래 쫓아버리려 했는데 소리가 안 나오면 참 당황스럽긴 하겠다. 귀신은 왔는데 소리는 안 나오고 놀라서 줄행랑치는 귀신을 보며 통쾌해하려던 마음에는 점점 공포가 쌓여갔겠지.


아, 나는, 장난과 농담을 좋아하는 나는 이런 우리 아빠를 도저히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가 없다. 너무, 사랑스럽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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