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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Dec 13. 2018

슬픔에는 무게가 없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얼마나 둔감한가.

슬픔은 자꾸 겪다 보면 무뎌지는 걸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누구 하나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함께 견뎌내는 수밖에….
ⓒ 조성민

“나야.”


젤리에게 전화가 왔다. 웬일인지 목소리가 꽉 잠겨 있다.


“안희주, 나 울었어.”


이유인즉슨 이랬다. 젤리가 일하는 카페에 60대로 보이는 엄마와 30대로 보이는 아들이 왔다. 음료를 주문하고 한쪽에 앉은 두 모자는 왔다 갔다 하는 젤리를 흘끔거리며 자기들끼리 머리를 모은 채 소근거렸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볼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였다. 한참을 주저하던 그들은 마침내 결심이 섰는지 일어서서 젤리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네, 물어보세요.”


“아가씨 머리에 꽂은 그거 누가 죽어서 하는 거지?”


“네?”


“아니, 우리 아들이 그게 그냥 장식용 머리핀이라고 하길래, 나는 아니라고 했거든. 자꾸 우겨서 그럼 누구 말이 맞나 내기하자, 그러고 내가 물어보는 거야.”


“아, 네….”


대답을 얼버무린 젤리는 그 길로 아무도 없는 공간을 찾아 들어가 홀로 울었다고 했다. 당시 젤리는 아버지 상을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에 상장(喪章)인 흰 머리핀을 꽂고 있던 터였다. 그들은 그 흰 머리핀의 용도가 궁금했나 보다. 그들에게는 그 흰 머리핀 위에 얹힌 상실의 슬픔 같은 건 보이지 않았나 보다. 얼마나 많은 눈물이 그 작은 머리핀 안에 담겨 있을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나 보다. 그저 타인의 슬픔을 상처를 내기의 대상으로 삼는 데, 자기 확신의 도구로 삼는 데 급급했나 보다.


우리는 타인의 슬픔에 얼마나 둔감한가. 그래서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든든하게 지켜주던 단단한 벽이 갑자기 무너져내린 충격 속에서 가슴을 치며 우는 친구를 지켜본 나는 두 모자의 잔인함을, 예의 없음을 비난하며 이런 물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슬픔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너보다 A가 더 슬프니까 A 앞에서 너무 슬픈 티 내지 마.” “뭐 그런 일로 슬퍼해? 배가 불렀구만.” “한숨 자고 나면 훌훌 털어버릴 수 있어.” “나도 다 겪어봤어. 그 정도 안 슬픈 사람이 어디 있냐. 공연히 엄살 부리지 마.”


사람의 마음에서 슬픔을 뚝 떼어다 저울에 올리는 상상을 한다. 나와 너의 슬픔이 저울 위에 얌전히 앉아 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저울추는 딱 중간에 멈춰 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더 무겁다고 나와 너의 슬픔이 손가락질을 하며 입씨름을 벌인다.


내 슬픔은 고통은 오롯이 나에게만 속한 것이기에 나에겐 100, 남에겐 0이 아닐까. 각각 100씩의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내가 더 슬프네, 내가 더 아프네 입씨름하고 있는 것 아닐까. 애초에 비교할 수 없는 대상을, 무게를 잴 수 없는 대상을 억지로 붙여놓고 무겁다 가볍다 아무 의심 없이 막연히 평가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부모님을 위로해드려야지 따님이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요.”


병원 관계자로 짐작되는 사람이 오빠를 영안실에 보내고 병원 한구석에 주저앉아 있는 내 머리 위로 말을 쏟아냈다. 눈물을 흘리며 화장실로 간 엄마의 뒷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 사람의 말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래, 내가 힘을 내야지. 부모님이 쓰러지지 않도록 내가 옆에서 잘 보살펴야지.’ 다리에 힘을 주고 끄응,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엄마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고 마지막 발인 날 아침, 함께 있던 사촌 동생이 문득 “근데 누난 괜찮아?”라고 물었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나에게 괜찮냐고 물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걸.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이 대부분 내게 “네가 부모님을 잘 위로해드려”라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사실 나도 안 괜찮았다는 걸. 나도 슬펐다는 걸. 어쩌면 당시에 내가 정신이 없어서 괜찮냐는 말을 듣고도 잊어버렸는지 모른다. 사람들이 눈빛으로, 토닥임으로 건넨 위로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위로를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없었을지도.


하지만 그때는 누구도 내 슬픔엔 관심이 없구나, 부모님 앞에서 나는 슬퍼할 수 없구나,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그 슬픔 앞에서 한 알의 모래 알갱이 같은 내 슬픔은 흔적도 없이 쓸려가 버리는구나, 나라도 내 슬픔에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나라도 날 불쌍하게 여겨야겠다, 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착실히 위험한 자기연민에 빠져들었다.


절망과 좌절을 이야기하거나 애인과 이별해 슬픔에 빠진 친구들을 보며, 겉으로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너희가 슬픔에 대해 뭘 아니? 내가 더 아파. 내가 더 불쌍하다고. 애인이 죽은 건 아니잖아. 다시 만날 수 있잖아. 보고 싶으면 볼 수 있잖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다는 게 어떤 고통인지 너희는 모르잖아. 오만함에 빠져 타인의 슬픔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대번에 무시했다. 내 슬픔의 무게는 90, 너희 슬픔의 무게는 고작 10. 감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으려 하다니, 거만한 표정을 짓고는 얼굴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이별은 작은 죽음이라고 한다. 연인과 이별했을 때 그동안 두 사람이 꿈꿔왔던, 만들어왔던 세계가 와르르 무너져내렸을 테니, 그 세계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는 일은 없을 테니 그 어찌 죽음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이런 이별을 경험한 후 내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절절히 깨달았다. 그 객기가, 허세가, 치기 어림이 너무나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는 무게가 없다. 아니, 슬픔의 무게는 수시로 변하기에 붙잡고 측정할 수 없다는 게 조금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아무렇지도 않다가 갑자기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굴러떨어지듯 가슴을 구르며 쓰린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 내내 바람처럼 잔잔히 가슴을 스치며 씁쓸함을 곱씹게도 한다. 돌부리로 자라나 걸려 넘어지게도 하고, 계절이 변하듯 어김없이 찾아와 울컥거리게도 한다. 어떤 슬픔이든 겪고 있는 사람은 아프기 마련이다.


상상력의 부재가 인간을 잔인하게 만든다. 공감하지 못하는 마음이 예의 없는 태도를 낳는다. 반대로 타인의 슬픔을, 나아가 그들의 삶을 상상하고 그것에 공감한다면 한 사람을, 그 사람의 세계를 구할 수도 있다. 자기연민이라는 독화살에 맞아 시름시름 앓고 있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맞은 것과 똑같은 독화살을 쏘아대는 걸 막을 수도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장례식장에 갈 일이 생기거나 슬픔에 빠진 친구를 보면 나는 우선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의 슬픔에 관심을 가지려 노력한다.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보다 더 슬픈 누군가를, 더 힘든 누군가를 보살피라고, 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라고 말하지 않으려 조심히 말을 고른다. 우선 당신의 슬픔을 보살피라고, 내가 당신의 슬픔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괜찮으니까 다 말하고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된다고, 당신이 당신의 슬픔과 마주하고 이겨낸 뒤에야 주변 사람의 슬픔도 보살필 수 있는 거라고. 이런 나의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며, 한편으로는 상처받은 들짐승처럼 잔뜩 독이 올라 있던 20대의 내 모습을 떠올린다.


슬픔은 자꾸 겪다 보면 무뎌지는 것일까? 눈물은 언젠가 마를 날이 있을까? 그건 아직 모르겠다. 그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슬픔에 몸서리치며, 누구 하나 슬프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함께 견뎌나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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