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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주 Dec 20. 2018

열정 없는 인간

내가 ‘나’라는 건 혼날 이유가 아니다.

그래, 나는 옥수수니까 옥수수 맺는 데에만 힘써야지. 
누가 물을 주든 주지 않든, 사랑을 주든 주지 않든 
흔들리지 말고 옥수수 되기에만 열중해야지.
ⓒ 조성민


한창 취업을 준비할 때였다. 학교를 어슬렁거리다 만난 한 선배가 우리 과 선배가 편집장으로 있는 영화 잡지사에서 사람을 뽑으니 생각 있으면 원서를 넣어보라고 말해주었다. 동기들은 일찌감치 도서관에 앉아 토익이다 토플이다 자격증이다 준비하는데 나는 운동장 한쪽 구석에 앉아 꽹과리를 깡깡거리며 ‘저런 광풍 속에 말려들지 않겠어. 회사 가서 사용하지도 않을 영어 따위 공부하지 않겠어’ 아무것도 가진 것 없으면서 청개구리 심보만 발휘하다가 막상 취업할 때가 되자 ‘이제라도 영어 학원에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즈음이라 선배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우선 서점에 가서 내가 원서를 넣게 될 (마음속으로는 이미 우리 회사인) 곳에서 발행한 잡지를 구입했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기며 어떤 기사가 어떤 톤으로 쓰여 있는지 확인했다. 발랄하고 재미있게 정보를 제공하는 글이 가득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좋아하는 데다 이런 글을 쓰는 일이면 재미있게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솟아났다.


바로 입사지원서를 작성했다. 자격 및 면허, 경력, 어학 능력 칸은 텅 빈 겨울 들판처럼 쓸쓸하고 찬바람만 가득했으나 자기소개서는 달랐다. 어릴 적 아빠 손을 잡고 비디오가게에 가서 양손 가득 중국 무협 영화 <의천도룡기>, <동방불패>, <소호강호> 등을 빌려오던 추억, 그렇게 엄마 아빠 오빠 내가 쪼르륵 누워 밤새 영화를 보던 추억, 어둠 속에서 홀로 밝게 빛나던 텔레비전, 달칵 탁 윙윙윙 비디오가 나오고 들어가고 돌아가던 소리, 그 빛과 소리와 풍경이 나에게 새긴 것들, 하늘을 붕붕 날아다니고 장풍을 쏘고 사자후를 내뱉는 그 영화가 내 가슴속에 뿌린 씨앗 같은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벼가 꽉 찬 풍요로운 들판처럼, 그 들판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시원한 가을바람처럼 자기소개서 칸만은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화로웠다. 내가 봐도 썩 잘 쓴 것 같아. 혼자 만족해하며 입사지원서를 (우리 회사에) 전송했다.


며칠 뒤 입사지원서가 통과되었으니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의 예상대로군. 기뻐하며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를 찾아갔다. 가슴이 요동치고 손에서 쉴 새 없이 땀이 솟아났다. 우리 과 선배라는 그 편집장님과 그분 사무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이력서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그분이 내게 처음 건넨 말은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사진을, 보정을 많이 했네요?”였다. “아, 네….” 예상치 못한 사진 언급에 몹시 당황해서 바보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아저씨, 보정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이 정도는 괜찮아. 다들 이렇게 해.’ 얼마 전 입사지원서에 넣을 증명사진을 찍으러 간 사진관에서 아저씨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을 어지러이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그 이후로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대체로 ‘어, 아, 그냥’ 같은 말을 섞어서 더듬더듬 논리성이란 조금도 찾아볼 수 없게 말하는 유형의 사람이다. 아주 가끔 가물에 콩 나듯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생각지 못한 질문이 들어오거나 상대가 예상에서 벗어난 반응을 보이면 말은 다시 갈 곳을 잃고 비논리의 세상 속으로 빠져든다. 아마 그때의 그 면접에서도, 당황으로 시작한 그 면접에서도 질문 너머 어딘가를, 답변 너머 어딘가를 더듬더듬 헤매었을 것이다.


그러다 마지막 말이, 그분이 나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 머릿속에 가슴속에 콕 박혀 들었다. “우리 회사에 다니고 싶은 거 맞아요?” “네? 다니고 싶은데요….” 이건 또 무슨 의도를 가진 질문인가 싶어 나는 다시 바보처럼 말을 얼버무렸다. “별로 다니고 싶지 않은 사람 같아 보여서요.” “아닌데요. 다니고 싶어요.” 나는 최대한 간절함을 담아 말했고, 편집장님은 그저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안녕을 고했다. 며칠간 머릿속에서 열심히도 다녔던 우리 회사와.


그로부터 몇 년 뒤, 여행책을 여러 권 펴낸 유명 저자를 만난 적이 있다.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내내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사람을, 그렇게 지치지 않는 사람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와, 어떻게 저런 기운을 가질 수 있지’, ‘와, 정말 대단하다’ 속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그분이 불쑥 나에게 말했다. “희주 씨는 젊은 사람이 왜 이렇게 힘이 없어요?” “네?” 속으로 감탄사를 연발하며 그분이 다다다다 쏟아내는 말을 멍하니 듣고 있던 나는 갑자기 나에게 던져진 질문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아, 저, 그게….”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분은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는 듯 다시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내가 그렇게 기운 없어 보이나?’ 초강력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부서진 건물의 잔해가 나뒹굴 듯, 질문 아닌 질문이 휩쓸고 간 내 안에는 이 물음만이 나뒹굴고 있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왜 이렇게 기운이 없니? 무기력해 보여. 희주는 치열하지 않아. 열정을 가져. 열심히 좀 해봐. 그렇게 게을러서 어떡하니. 잊을 만하면 들어왔다. 이런 말들을. 처음엔 ‘내가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말들이 ‘내가 너무 대충대충 사나?’ ‘내가 그렇게 게으른가?’ ‘내가 잘못 살고 있나?’ 시간이 지날수록 깎이고 깎여 날카로운 비수가 되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혼나는 기분이 들었다. 혼나는 건 내가 잘못했기 때문이니까, 잘못은 고쳐야 하니까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더 열심히 살려고 잠을 줄여보기도 하고, 일도 더 많이 받아서 하고, 하기 싫은 일 부끄러운 일 두려운 일도 우선 해봐야 극복이 될 거라며 억지로라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힘이 들고 우울했다. 우울해지고 우울해지고 우울해져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 살고 있는 거지?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데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해서 맨날 혼나야 하는 거냐고? 남에게 피해 안 주고, 주어진 일 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조용히 평화롭게 살면 안 되는 거야? 도대체 얼마나 더 해야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건데? 항상 기운이 넘쳐서 열정적으로 이 일도 저 일도 척척척 다 해내야 잘 사는 거야? 쉽게 지치고, 그래서 쉬엄쉬엄 느슨하게 사는 나 같은 사람은 다 실패자야?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더 큰 문제는 세상이 나에게 쏟아부은 말들을 내면화한 내가 그 기준으로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고 채찍질하며 자신을 부적응자, 낙오자, 모지리, 못난이로 취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조차 나를 미워하고 홀대하고 학대하고 있었으니,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즐거울 리 없었다.


예전에 어떤 선생님은 나를 가리켜 “희주는 시동 걸리는 데 시간이 좀 걸려. 하지만 시동이 걸리면 내처 달려 나가지”라고 말씀하셨다. 슬로 스타터(Slow Starter). 어쩌면 나는 모든 세상에 낯을 가리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처음 만나는 사람뿐 아니라 처음 하는 일, 처음 사용하는 물건, 처음 가보는 장소, 처음 겪는 상황. 그 모든 것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 조용히 탐색하고 지켜보고 알아보고 오래 생각해본 다음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리라. 달리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인내와 믿음이리라.


물론 세상은 너무 바쁘고 언제까지고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느라 기차가 멈춰 서 있을 수는 없다. 나 하나 태우자고 그 많은 사람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겠지. 그렇다면 나는 시골길을 달리는 작은 마을버스를 타면 되지 않을까. 저 기차에 타야 한다고 자신을 채찍질할 게 아니라, 그렇게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게 할 게 아니라 다리가 아파 빨리 달리지 못하는 파란 지붕 집 할머니가 오실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골의 마을버스를, 강아지 밥 주고 오시는 감나무 집 할머니를 기다려주는 마을버스를 타면 되지 않을까. 왜 이제야 오냐고 구박은 좀 받겠지만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려주는, 좀 많이 늦어도 기다려주는 그런 버스를.


내가 ‘나’라는 건 혼날 이유가 아니다. 나의 잘못이 아니다. 잘못이 아니니까 고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자신의 속도대로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서, 맡은 일은 책임감 있게 해내면서 걸어가면 된다. 옆 사람이 처음부터 치고 나간다고 불안해할 필요 없다. 물론 불안하겠지만 ‘저 사람처럼 달리다간 난 중간에 쓰러져버리고 말 거야’라는 걸 알고 있으면 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거기에 맞춰서 천천히 가면 된다. 쉬엄쉬엄 하늘도 보고, 꽃도 보고, 잠깐 앉아서 친구랑 얘기도 하고. 그냥 그렇게 ‘나’로 살아도 된다.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인지를 알고 해야 할 바를 열심히 함으로써 홀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미고 옥수수를 보면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주변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드는 것인지를 배웁니다.”


시골에서 농사지은 옥수수를 소개하며 친한 선배가 보내온 문자. 유독 가뭄이 심했던 그해에 물도 제대로 주지 않은 옥수수가 그래도 힘을 내 열매를 맺었다며 미안하고 고마워서 ‘미고 옥수수’라 이름 지었다는 문자. 무심한 듯한 이 문자가, 열심히 힘을 내 열매를 맺었다는 옥수수가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큰 위로를 주었다. ‘그래, 나는 옥수수니까 옥수수 맺는 데에만 힘써야지. 누가 물을 주든 주지 않든, 사랑을 주든 주지 않든 흔들리지 말고 옥수수 되기에만 열중해야지. 옆에 늘어선 감자를 고추를 부러워하지 말고, 콩처럼 쑥쑥 자라야지 토마토

처럼 빨갛게 익어야지 남의 기준에 맞춰 나를 바꾸려 하지 말고 알이 굵고 단단한, 달큰하고 맛 좋은 그저 옥수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지.’


큰 기차에 타서 앞으로 쭉쭉 달려 나가는 건 멋진 일이지만 작은 마을버스에 타서 파란 지붕 집 할머니를, 강아지 밥 주고 오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도 나름 멋진 일이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래 자세히 바라볼 풍경은,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그동안은, 쟤는 어떻게 나보다 더 늦냐고 구시렁거리면서 함께 떠나는 그 길은 분명 풍성하고 따뜻하고 평화로울 것이기에.


열정 없는 당신이, 열정이 드러나지 않은 당신이, 느슨한 당신이, 조금 늦은 당신이, 좀 더 조심스러운 당신이, 예민한 당신이 알이 굵고 단단한 ‘당신’으로 피어나기를. 나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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