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이 이해하기 <1>
“바보같이 정산을 잘못했어.”
내 동기에게 외친 말이었다. 입사한 지 4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일을 창조적으로 만들기 일쑤인 나는 여전히 영화 <인사이드아웃>에 나온 ‘불안이’와 친해지지 못하고 있다. 영화 속 ‘불안이’는 주인공 라일리의 완벽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 감정 본부의 제어판 주변을 빙빙 돌며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불안이’는 대체 왜 이런 행동을 하는 거며, 나는 왜 ‘불안이’와 한 발짝도 더 나아지는 사이가 되지 않는 걸까?
‘실수하면 안 된다’를 바라는 나와 ‘지금의 나’의 간극
사실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에 경쟁이 시작되는 한국에서는 ‘실수하면 안 된다’, ‘잘해야 한다’라는 문화적 정서가 짙다. 그러나 주변의 시선과 잣대로 높아질 만큼 높아진 기대치와 달리 겸손함을 미덕으로 보는 곳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자신을 또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높은 기대치와 낮은 내 모습 간의 차이가 커버리니, 난 잘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내게 실망하고, 화가 나고, 슬퍼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회사에서 실수했을까 봐 눈치 보고 조마조마한 마음은 이러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나는 완벽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일 잘하는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데, 내가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내 실수를 들키기 싫고, 무책임한 사람이 되기는 더 싫다.
불안이가 빙빙 돌 때 애써 찾아보는 정당성
마음속 ‘불안이’가 영화 속 주인공 라일리에게 했던 거처럼 내 마음도 혼란스럽게 만든 적이 종종 있다. 갑자기 불씨가 붙여진 불안은 감정을 툭 건들어 부정적인 생각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저렇게 되면 어떻게 하지?’ 머릿속은 이미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어떤 핑계를 대고, 합리화할지 고민한다. 그러나 애써 정당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행위는 내가 불안에 의미 부여만 할 뿐이다.
리사 팰드먼 배럿 박사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서 배럿 박사는 우리가 불안이라는 감정에 크게 흔들리는 건 이런 감정 개념이 사회에서 의미 있고, 쓸모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뇌과학자이기도 한 배럿 박사는 사실 우리 뇌는 바라본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과거의 경험과 감정의 범주화를 통해 예측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리며 감정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러한 예측은 맞을 때도 있지만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수련회에서 담력 훈련할 때 혹은 귀신의 집에 입장할 때 우리는 귀신 분장을 한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다는 예측을 하기에 심장이 더 두근거리고 이를 ‘공포’라는 감정으로 분류해서 무섭다고 표현한다. 불안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앞서 말했던 소소한 업무 실수를 다시 얘기해 보자면 ‘신입도 하지 않을 만한 실수를 하면 내 평판은 바닥을 칠 거야’ 등등의 예측으로 내가 내 불안을 만들어내고, 예측을 정당화한다. 사실은 별거 없는데, 해결하려면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자체적으로 초조함을 조성했다.
책을 읽고 나니 감정을 통제하는 뇌는 완전히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뇌가 과거 경험을 기반으로 어떤 특정 상황을 마주할 때 내가 원하는 감정을 느끼도록 새롭게 구성하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닌, 내가 그 감정을 생기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 만들어내는 것, 그래서 불안이 커지는 것도 온전히 내가 그 감정을 의미 있게 해석하고 합리화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기대하고 원하는 것이 많으면 고통스럽다. 개인적인 기대든, 타인에 대한 기대든 집착하게 되면 ‘불안이’가 가만히 있질 못한다. 남들이 다 하는 좋은 거 따라 하고, 나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것 역시 과도한 기대와 욕심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다. 이러한 기대와 욕심은 내게 불안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부여하도록 정당한 이유를 주었고, 증폭시켰다. ‘불안’이라는 감정을 통해 미래를 예측해야 하고, ‘불안’은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쩌면 불안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채 불안과 헤어지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