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J의 치명적 사각지대
퇴직금이 통장에 찍힌 날, 나는 처음으로 돈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스무 살 때부터 일했던 모든 시간이 숫자로 바뀌어 내 통장에 들어왔다. 회사에서는 수백, 수천만 원의 예산을 다루면서도 정작 내 돈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문득 이 돈으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지금이 기회야.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니까."
동생의 눈이 반짝였다. 투자 이야기를 시작하면 늘 그랬다. 동생의 열정이 나에게도 전해졌다. 나는 돈을 모으고 불리는 데는 관심이 없었지만, 동생의 말에 나도 모르게 혹했다. 이제 나도 편하게 살고 싶었다. 퇴직금을 모두 맡기기로 결정한 건 그래서였다. 돈보다는 사람을 믿었다고 해야 할까. 어떤 말을 들어도 팩트 체크를 습관화하면서 살았던 나였는데 말이다.
"누나 미안해. 내가 어떻게든 꼭 돈을 마련해서 누나 돈은 찾아줄게. 정말 미안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모든 게 사라졌다.
드라마나 뉴스에서나 들을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있었다.
웃긴 건, 내가 먼저
"괜찮아"라고 말했다는 거다.
돈은 또 벌면 되지만
동생과의 관계는 한 번 틀어지면
돌이킬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 그래.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 돈이 내 돈이 아니었나 보지 뭐."
늘 그랬다. 업무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내 사람들 앞에서는 이상할 만큼 너그러웠다. 한번 믿기 시작한 사람은 끝까지 믿고 싶었다. 동생이 더 힘들어할까 봐, 우리 사이가 틀어질까 봐 화도 내지 못하고 웃어넘겼다.
돈을 잃고 난 다음 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이 밝았다. 햇살은 여전히 따스했고, 고양이는 늘 그렇듯 밥을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세상은 달라진 게 없는데, 내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동생과는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서로를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되고, 계절이 바뀌어도 깨지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지키려 했던 관계도 서서히 멀어져 갔다. 돈 때문에 관계가 틀어질까 봐 애썼던 게 무색하게도, 그 시기에 친했던 사람들과도 하나둘 연락이 끊겼다. 관계를 지키려다 돈도 잃고, 결국엔 관계마저 잃어버렸다. 그때 깨달았다. 업무에서는 완벽했던 내가 왜 사람 앞에서는 이토록 허술했는지를. 왜 돈 앞에서는 이토록 무심했는지를.
일은 내가 열심히 하면,
내가 고생하면 어떻게든 결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았다.
나의 노력과 정성에도 불구하고
늘 예상치 못한 값을 출력해 냈다.
난, 사람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 두려움을 마주하지 않은 대가로
10여 년 일해온 결과물을 잃었고,
또 사람도 잃었다.
아침이면 여전히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커피를 마시고,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밤이면 불면증에 시달렸고, 자주 식은땀에 잠을 깼다. 눈을 뜨면 늘 먼저 동생의 카톡을 확인했지만, 늘 부재중이었다.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내 발아래의 땅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