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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방황

정해진 길을 벗어난 밤

by 먼지잼

누군가 내게 "괜찮아?"라고 물으면 나는 늘 "응, 괜찮아"라고 대답했다. 입술 끝에 걸린 미소는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웠다. 거울 속 나는 여전히 단정했고, 매일 아침 화장도 빼먹지 않았다. 하지만 그 미소 뒤에 숨은 공허함은 날이 갈수록 짙어져만 갔다. 마치 누군가 내 안에 검은 구멍을 심어놓은 것처럼.


아침이면 늘 하던 대로 일어나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커피를 내리고, 산책을 나갔다. 여유로워 보이는 이 일상이 사실은 시간을 죽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그때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 앉아 책을 펼쳐들었지만, 한 문장도 읽히지 않았다. 그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으면 나도 무언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까 해서였다.


통장 잔고는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다. 고정 지출은 그대로인데, 수입은 사라졌다. 청구서를 볼 때마다 숨이 막혔다. 카드값, 월세, 공과금... 숫자들이 벽돌처럼 쌓여갔다. 밤이면 스마트폰을 켜고 구직 사이트를 뒤적였다. JD를 읽을 때마다 낯선 언어를 해독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해온 일들이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것만 같았다.


이력서를 쓰려고 노트북을 펼 때마다 손가락이 떨렸다. 스타트업에서의 경험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기존에 없던 직무를 어떻게 기존의 틀에 맞춰야 할지... 내 경력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어디에도 맞지 않았다. 이력서 작성란의 깜빡이는 커서가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위로한다며 말했다. "더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거야." "이런 시기가 있어야 더 성장하는 거야." 그들의 말이 틀리진 않았겠지만, 그 위로는 내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마치 익사하고 있는 사람에게 '수영은 건강에 좋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은 커져갔다. 처음에는 '이제 좀 쉬어도 돼'라고 스스로를 달래봤지만, 쉼은 곧 멈춤이 되었고, 멈춤은 후퇴가 되어갔다. 뒤처진다는 불안감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등을 할퀴었다. 매일 아침 스마트폰을 켜면 다들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늘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잠시 멈추고 나니 내가 어디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한밤중에 길을 잃은 아이처럼. 어릴 적 엄마 손을 놓쳤을 때의 그 공포가 다시 찾아왔다. 사방이 낯설고,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미아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늘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대로 살아왔다. 이력서에 적힌 나의 강점들. 리더십, 추진력, 완벽주의...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이불 속에 숨어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이 사람은 누구지? 모든 게 무너져 내린 자리에 홀로 남겨진 이 사람은 누구지?


밤이면 끝없이 떠오르는 질문들. "이제 뭘 하지?"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됐을까?" 그 질문들은 답을 구하는 게 아니라, 나를 옥죄는 올가미가 되어갔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시간은 흘러갔지만 앞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한때는 내 것이었던 모든 확신과 자신감이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저...
끝없는 밤의 한복판에 홀로 서있는 미아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주기를,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길 잃은 아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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