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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시작

가장 어두운 출발선 앞에 서다

by 먼지잼

모든 전화를 거절했던 시기가 있었다. 회사에 연락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멀뚱멀뚱 휴대폰만 쳐다보던 나, 인사팀에서 걸려온 전화를 끊어버린 나, 동생의 사과 전화조차 거절했던 나. 어느새 전화벨 소리는 두려움이 되어있었다. 그 시기에 왜 하필 그 전화는 받았을까.


재정은 이미 바닥이다 못해 마이너스였다. 통장 잔고는 매일 조금씩 줄어들었고, 고정 지출은 그대로였다. 카드값, 월세, 공과금... 숫자들이 벽돌처럼 쌓여갔다. 더 이상 취업을 안 하고 버틸 수가 없었던 그때, 몇 달 전 아는 오빠와의 대화가 생각났다. "일자리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그때의 나는 콧대 높게 거절했었다. 취업 생각 없다고,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 사이 내가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렸다. 퇴직금은 사기로 날아가버렸고,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프리랜서 일은 번번이 실패했다. 이제는 더 이상 큰소리 칠 자신도, 힘도 없었다.


"혹시... 아직 자리 있나요?"


자존심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면접 날짜를 잡았다. 회사가 어디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묻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았다. 질문이 많아질수록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어차피 조건을 따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하루빨리 출근을 해서 재정을 원상복귀 시키는 것. 그 목표만 생각했다.


"유통회사다 보니까 출근이 빨라요. 7시부터 근무해야 하는데 집이 멀잖아요. 괜찮으시겠어요?"


면접장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위치는 경기도 외곽. 하루 100km를 자차로 운전해야만 다닐 수 있는 거리였다. 출근 시간이 빨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왕복 3시간 30분. 매일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 눈에 불가능해 보이는 이 상황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단단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그건
절박함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여기서 무너지면
영영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절박함.

첫 출근 날, 새벽 4시에 눈을 떴다. 아직 익숙지 않은 출퇴근 길에 생길 변수를 계산해 조금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시간, 나만 홀로 길을 나선다. 고요한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 멈춰있는 것처럼. 그 멈춰있는 시간 속을 나만 달리고 있는 것처럼. 그 안에서 나는 내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어제의 나는 자존심 때문에 잡지 못했던 손을, 오늘의 나는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어쩌면 조금 더 단단해져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내게 물었다. 그렇게 먼 곳까지, 무슨 용기로 시작할 수 있었냐고. 용기라기보다는 오기였을 것이다. 나니까 할 수 있다는, 아니 나니까 해내야만 한다는 오기. 그리고 그 오기는 틀리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해가 뜰 테니까. 비록 그 해가 뜰 때까지 얼마나 많은 새벽을 달려야 할지는 모르지만.


시작이란 게 그런 것이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지 않았다.
그저 어느 날 문득,
깨어나지 말아야 할 시간에
깨어나는 것.
가지 말아야 할 길을 홀로 달리는 것.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다시 시작된 나의 하루하루. 계획에 없던 시작이, 이렇게 내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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