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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설렘

병명은 입덕부정기

by 먼지잼 Jan 30. 2025

유독 전표 실수가 잦았던 주임님이 계셨다.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급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전표를 다시 확인하시던 그분. 그때마다 내 심장은 쿵쾅거렸고 손은 덜덜 떨렸다. 실수를 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더 큰 실수가 이어졌다. 유독 그 주임님의 일만 맡으면 긴장이 되어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주임님... 죄송해요. 정말 죄송합니다."


문자와 함께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주임님은 괜찮다는 말 대신 다음 업무를 던져주셨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늦은 시간 용기를 내 카톡을 보냈다.


"주임님... 퇴근하셨어요?"

"아직이요.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 혹시 제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하신가 해서요."

"아닙니다. 이런 거 일일이 신경 쓰면 일 못해요. 일하다 보면 실수도 하고 그런 거죠. 괜찮습니다."

"그래서 제가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어서... 혹시 주임님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을까요?"


한동안 답이 없더니 주임님이 답장을 보내왔다.


"그러면, 오예스 한 박스 사주세요."

"오예스요? 네! 당장 내일 준비해둘게요. 혹시 음료는 필요 없으세요?"

"네, 음료는 괜찮아요. 오예스도 충분히 부담스러운데요."

"그럼 앞으로 실수할 때마다 오예스 사드릴게요."


다음날 출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오예스를 한 박스 샀다. 회사 냉장고에 '관리팀 여직원 것이니 손대지 말 것!'이라는 메모를 붙이고 주임님께 잊지 말고 가져가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정말 그저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대리님이 "둘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오예스를 챙기던 주임님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면서 수줍게 웃는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내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주임님이 수줍게 웃는 모습이 다음날까지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니, 이 사람 저렇게 웃을 줄도 아나…? 성격이 급하다거나 무섭다고만 생각했는데. 내가 너무 겁먹어서 이 사람의 다른 모습을 보지 못한 걸까? 주말에 교회 사람들과 딸기체험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딸기를 따면서도 자꾸 그 웃음이 떠올랐다. 집으로 돌아와 교회 사람들 몫으로 딸기를 나눠 담다가, 도시락통을 하나 더 챙기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걸 어떻게 전해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다가, 결국 대리님을 찾아갔다.


"대리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제가 주면 어색할 것 같아서..."


다행히 대리님이 흔쾌히 도와주셨다.


"이거 언니가 준비한 거래!"


대리님의 말에 주임님은 갑자기 어색한 행동을 시작했다. 도시락통을 들었다 놨다, 사무실을 나갔다 들어왔다. 그러더니 대리님에게 카톡을 보냈다나.


'이거 나만 주는 거야? 아… 진짜 부끄럽게!'


오후가 되자 주임님이 도시락 사진을 보내왔다.


'맛있네요.'


짧은 한 마디에 내 심장이 또 쿵쾅거렸다.


"언니… 혹시 쟤한테 관심있어요? 왜 주임님만 챙겨요?"


그날 오후, 대리님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아니에요, 대리님이랑 친하신 분이고 잘 챙겨주시길래 저도 챙긴 것뿐이에요."


시치미를 뗐지만, 심장은 계속 쿵쾅거렸다.


'나 설마 내가 그렇게 무서워하던 주임님을... ?'

'아냐아냐, 그럴 리가. 그냥 미안해서 신경 쓰이는 거겠지.'

'근데 왜 자꾸 눈이 가지?'

'아니, 그건 또 실수할까봐 긴장해서 그런거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내 감정을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감정이 있었다. 주임님의 목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쾅거리고, 어색한 행동을 할 때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게도 그 뒤로 주임님 전표에서는 더 자주 실수가 났다. 손에 꼭 쥐고 있던 전표를 놓친다거나, 잘못된 코드를 입력한다거나. 하지만 이제는 그 실수가 예전처럼 무섭지만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실수할 때마다 살짝 기대되는 마음도 있었다. 주임님이 또 어떤 표정을 지을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매번 달라지는 그 사람의 새로운 모습들이 자꾸만 궁금해졌다.


계획에 없던 이 감정은,
아무래도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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