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J의 썸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퇴근과 함께 모든 업무 연락이 끊기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생겼다. 주임님과의 카톡이 조금씩 늘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업무 관련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어느새 퇴근 후의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퇴근하셨어요?"
"오늘은 뭐 드셨어요?"
"어떤 유튜브 보세요?"
때로는 내가, 때로는 주임님이 먼저 연락했다. 일상적인 안부였지만, 매일 밤 서로의 하루를 나누는 시간이 조금씩 쌓여갔다. 업무 중에도 가끔 힘들다는 내용의 카톡이 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위로가 되는 말을 찾으려 애썼다. '힘내세요', '기운내세요'라는 말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한참을 고민하며 메시지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내 답장을 기다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가슴 한켠이 간질거렸다.
퇴근 후의 시간이 달라졌다.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게 되고,
카톡 알림음에 자꾸 귀가 기울여졌다.
주임님의 이름 석 자가
화면에 떴다 사라질 때마다
작은 두근거림이 일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다음날이 휴일이라 그런지, 주임님의 카톡은 평소와 달랐다. 친한 형과 술을 마신다며 보내온 사진 한 장. 평소의 진중한 모습 대신 장난스러운 이모티콘과 함께 오는 메시지들. 밤이 깊어갈수록 카톡은 계속됐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단단히 설레고 있었다.
'지금... 통화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보내고 나서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어버린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답장은 한참이 지나서야 왔다.
"지금은 좀..."
단 두 글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이어 온 "내일은 가능할 것 같아요"라는 메시지에 희망을 걸었다. 그날 밤 나는 이상하리만치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었다.
다음날, 나는 하루종일 주임님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시계를 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오후가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연락을 넣었다.
"혹시 일어나셨나요?"
"네, 일어났어요."
건조한 답장. 하지만 이미 마음은 앞서가고 있었다.
"통화... 가능하실까요?"
"무슨 일이신데요?"
가슴 한켠이 서늘해졌다. 어제 통화가 가능하다고 한 말은 어디로 간 걸까. 불안한 마음에 다시 물었다.
"혹시 불편하신가요...?"
"솔직히 좀 그래요. 휴일인데 업무 일도 아니고 통화까지 하자고 하시니..."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동안의 퇴근 후 카톡들, 소소한 일상의 공유들,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순간들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불편하시다면 통화하지 않아도 돼요. 별일 아니에요."
"네^^ 내일 봬요!"
이모티콘까지 붙어 있는 저 기쁜 답장이 더 아팠다. 원래 전화해서 우리가 무슨 관계인지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모든 게 내 일방적인 착각이었다는 게 너무나 선명해졌다. 자존심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 주임님과의 카톡은 업무적인 내용으로만 채워졌다. 퇴근 후의 안부도, 소소한 일상의 공유도 사라졌다. 예전처럼 형식적인 관계로 돌아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저 형식적인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혼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던 것일 수도 있다.
설렘이라는 감정은 참 이상했다. 차곡차곡 쌓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무너지는 데는 단 한 순간이면 충분했다. 나의 서둘러진 고백, 아니 고백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통화 요청 하나로 모든 게 깨져버렸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불확실한 관계가 주는 불안감을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애매한 그 지점에서 조금 더 머물러 있었다면,
혹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도(혹은 불행히도) 일은 변함없이 돌아갔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하고, 맡은 일을 처리하고, 저녁이면 퇴근했다. 다만 이제 퇴근 후의 시간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카톡 알림음에 더 이상 가슴이 뛰지 않았고, 핸드폰을 자주 확인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계획에 없던 설렘은, 계획에 없던 이별이 되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