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악의 빨간 뚜껑
입사 첫날, 나는 소주가 그냥 '소주'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했다. 거래처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르고, 같은 회사 제품이라도 종류가 여러 개였다. 게다가 사장님들은 정확한 제품명 대신 자신들만의 언어로 주문했다.
"아가씨, 빨간 뚜껑으로 열 박스 줘."
빨간 뚜껑이라... 우리 회사에서 취급하는 소주 중에 빨간 뚜껑이 몇 개나 될까?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정확히 어떤 제품을..."
"아이고, 늘 시키던 건데 그것도 모르나? 거 빨간 뚜껑 있잖아."
늘 시키던 거. 하지만 나는 오늘이 첫날이었다. 옆자리 대리님의 도움을 받아 겨우 주문을 받았지만, 이런 일은 매일같이 반복됐다. 어떤 날은 "그전에 주문했던 거로 줘"라고 하시고, 또 어떤 날은 "노란 라벨 붙은 거"라고 하셨다.
내 실수는 주로 거기서 시작됐다. 같은 회사 제품인데 도수만 다른 걸 잘못 입력한다거나, 비슷한 이름의 다른 제품을 입력하는 식이었다. 문제는 이런 실수가 배송 기사님들의 발을 묶는다는 거였다. 잘못된 제품을 실어 나르느라 다른 배송이 늦어지고, 거래처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오고...
처음에는 배송 기사님들의 얼굴과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아침마다 열두 명의 기사님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누가 누군지 헷갈렸다. 실수로 잘못된 주문을 넣으면 어느 기사님께 사과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반복됐다. 회사에 간식이 들어오면 모든 기사님들 몫까지 챙겨드리는 게 이 회사의 문화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배송 기사님들이 생각보다 따뜻한 분들이었다는 거. 내가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드리면, "아이고, 괜찮아요. 다들 처음엔 그래요."라며 다독여주셨다. 특히 김기사님은 내가 실수할 때마다 "이번엔 무슨 실수했어요?"하고 웃으며 물어봐주셨다.
하지만 가장 힘든 건 따로 있었다.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출근하는 생활이 한 달째. 주문이 가장 많이 들어오는 시간에 자꾸 졸음이 쏟아졌다. 긴장하고 또 긴장해도 책상에 앉아있으면 눈이 감겼다. 잠깐이라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입니다. 같이 밥 먹으러 가시죠!"
점심시간도, 잠깐의 휴식시간도 늘 함께여야 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있으면 어김없이 누군가 와서 깨웠다. 퇴직금을 날린 처지에 구내식당이 있다는 건 분명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건 동시에 점심시간조차 자유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 회사의 '가족 문화'는 강제성이 있었다.
입사 한 달 차에 첫 회식이 잡혔다. 술은 못 마시지만 빠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사실 건배사는 생각보다 잘 준비했다. 처음에는 "나를 동료로 받아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라며 인사를 건넸고, 두 번째는 미리 준비한 건배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3번 정도 더 건배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누가 해보겠나?"
회장님의 말씀에 내가 손을 들었다.
"막내인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패기 있게 나서서,
"앞으로 이런 마음가짐으로 일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의 기쁨이 저의 기쁨입니다.
제가 여기! 하고 외치면 여러분은 저기!
라고 해주십시오.
여기!!" 하고 외쳤다.
집에 와서는 밤새 이불킥을 했다. 정말 하기 싫은 일도 어떻게든 완벽하게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그리고 정작 잘 해냈는데도 마음이 원하지 않는 일을 했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못된 버릇.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결정적인 사고가 터졌다. 시스템 오류로 배송장이 이중 출력되면서, 모든 주문이 두 배로 입력된 거였다. 배송 기사님은 그 배송장대로 물건을 준비해서 출발했다. 그날은 정말 아수라장이었다. 기사님은 이미 실어간 물건을 다시 싣고, 창고로 돌아왔고, 퇴근 시간도 평소보다 더 늦어졌다. 내 실수 하나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다니. 죄송하다는 말로도 해결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대리님... 제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눈물이 났다. 창피했다. 이제 겨우 한 달인데 벌써 포기하려고 하다니. 대리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나서 먼저 카톡을 보냈다.
'대리님, 죄송해요.
실수할수록 더 열심히 하려고 했어야 하는데,
먼저 포기하려는 모습 보여드려서...
만약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잘하고 있을 때 그만두고 싶어요.'
잠시 후 대리님의 답장이 왔다.
'제가 더 잘 가르쳐드릴 수 있었는데, 언니를 너무 다그친 것 같아요. 제가 더 미안해요.'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내가 이런 위로를 받을 자격이 있을까. 이렇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눈물이 나 보이고, 한 달 만에 포기하려고 했던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한 걸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이런 내가 과연 이 일을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