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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에 없던 고백

질문이 된 마음

by 먼지잼

그 이후 주임님과의 관계는 미묘한 줄타기의 연속이었다. 퇴근 후의 개인톡은 점점 더 빈번해졌고, 대화는 자연스럽게 업무 외적인 영역으로 흘러갔다. 이런 관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혹은 향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내 마음이 조금씩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불확실한 상황을 견디지 못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애매함이 주는 설렘이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그 불확실함 자체가 우리 관계의 본질이었을지도 모른다.


5월 연휴를 앞둔 어느 날이었다. 주임님이 먼저 휴일에는 뭐 하냐고 물어왔다.


"속초에 가요. 어른들 뵈러."


"아, 장거리 운전이네요. 힘드시겠어요."


평범한 안부 같은 대화였는데, 그날따라 이야기가 조금 더 이어졌다.


"주임님은 보통 휴일에 뭐 하세요?"


"영화도 보고… 친구들도 만나고…."


"영화도 보러 다니세요???"


"네, 혼자 보는 거 좋아해요."


순간 용기가 났다. 아니, 그보다는 충동이 앞섰다고 해야 할까.


"혹시... 정말 만에 하나라도, 혼자 보기 싫을 때가 있으면 저랑 같이 보러 가실래요?"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야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제안을 해도 되는 걸까. 너무 성급했나.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ㅎㅎㅎ"


웃음으로 얼버무리는 답장. 그러나 곧이어 예상치 못한 제안이 왔다.


"밥이나 한번 먹어요. 근데 집이 머시잖아요."


내 심장은 다시 한번 쿵쾅거렸다.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아니요, 제가 갈게요."


주임님이 먼저 제안한 약속. 그것도 자기가 먼저 오겠다고 하다니. 이건 분명 좋은 신호일 거야. 하지만 내 생각보다 빠르게 그날이 오지 않았다. '이번 주말일까?' '다음 주말일까?' 궁금증과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평소의 나라면 이런 불확실한 기다림을 견디지 못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설렘과 불안이 섞인 감정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왔다.


평소처럼 퇴근 후의 대화 속에서, 그날도 야근을 하는 주임님을 항상 응원한다고 말을 했다. 사소한 말이었는데, 예상치 못한 반응이 돌아왔다.


"응원하지 말아 주세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응원하는 건 제 마음 아닌가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모든 것을 뒤바꿔놓을 질문이 왔다.


"혹시... 먼지잼님 저를 좋아하시거 아니죠??"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도 느껴졌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
차라리 이게 더 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저 주임님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많이요.
남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좋아해요."


내 답은 생각보다 담대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주임님의 반응은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아…… 제가 너무 서툴렀네요. ㅠㅠ 진짜 저를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그동안 전혀 모르셨어요? 그렇게 티를 냈는데..."


"혹시나 했지만, 진짜인지는 몰랐죠. 죄송해요. ㅠㅠ 솔직히… 저도 제 감정을 잘 모르겠어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지도. 저도 정리가 잘 안 되네요."


이어지는 대화는 마치 잘 짜인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고, 주임님은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물었다. 거절해 놓고 왜 그런 걸 물어보냐며 항변했더니, 주임님은 '나중에라도 얘기해 달라'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거절당한 마음도 아프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주임님이
내 감정의 무게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나는 그동안 주임님의 모호한 태도에서 희망을 발견하려 애썼던 것 같다. 퇴근 후의 대화들, 밥을 먹자는 약속, 그 모든 것들이 어쩌면 내 바람이 만들어낸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불확실함 속에서도 확신을 찾으려 했고, 그 애매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했다. 그게 얼마나 헛된 일이었는지를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특히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나는 언제나 주도적인 삶을 살아왔다. 상황을 읽고, 그에 맞춰 계획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것. 그게 나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가 먼저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임님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 것뿐인데, 마치 일방적으로 좋아했던 사람처럼 취급받는 상황이 견디기 힘들었다. 더구나 "진짜 좋아하는 줄 몰랐다"는 말은 그동안의 우리 관계를 전부 부정하는 것 같았다. 퇴근 후의 대화들, 서로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 모든 시간들이 내 착각이었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주임님도 나를 의식하고 있다고,
어떤 식으로든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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