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발작 중입니다만
나는 더 이상 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한때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 뚜렷했는데. 일도, 관계도, 내가 가야 할 길도 모든 것이 선명했었는데. 이제는 거울 속 낯선 얼굴을 마주하는 것처럼, 내 안의 나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언니, 엔티제 아닌 것 같아요.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는 거 아니에요?"
대리님은 나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보고 있는 언니와 내가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다르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전 회사에서 내가 얼마나 냉철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는지, 일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를 피력했지만 그럴수록 대리님은 나를 더 이상하게 보는 것만 같았다. 이런 대화가 반복되자 스스로도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혹시 ENTJ라는 타입에 나를 끼워 맞추려 했던 걸까? 그동안 이 레이블은 내게 일종의 안전망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단단히 믿어왔던 정체성. 그런데 그마저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주임님을 대하는 내 모습도 낯설었다. 늘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던 내가, 감정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처음 보는 내 모습이라 사랑인가 생각했다. 통제할 수 없는 마음, 예측할 수 없는 행동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교회 사람들도 달라진 나를 보며 "이게 원래 이 사람의 모습이었나?" 하는 눈치였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도, 모든 걸 이겨내는 강인한 사람도 아닌, 그저 바닥을 치며 울어대는 나약한 존재. 그게 진짜 나의 모습이었던 걸까?
이 정도로 통제력을 완전히 잃은 건
처음이었다.
회사에서 잘리고, 퇴직금도 날리고...
늘 계획대로, 의도대로 살아왔던 내가
처음으로 완전한 불확실성을 마주했다.
그 혼돈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낯선 존재가 되어갔다.
이 모든 게 내가 심리 상담을 받기로 한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궁금했던 TCI 검사도 함께 진행했다. 전화 상담이었지만, 상담사의 목소리에는 따뜻함이 묻어났다. 검사 결과를 보며 상담사가 말했다.
"자기 수용성이 낮은데 반해 타인에 대해서는 매우 열려있으시네요. 사람들을 좋아하면서도 거리를 두려는 성향이 있으시고... 먼지잼 님, 그동안 많이 외로우셨겠어요."
상담사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예기치 못한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 그토록 부정해 왔던 말. 외롭다는 것. 나의 지금 불안은 사실 내가 모든 걸 혼자 해내야만 한다는, 그 무게와 외로움 때문이었다는 걸. 나는 완벽하게 무장해제 되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강해야만 했던 나, 완벽해야만 했던 나, 그 무게를 혼자 짊어지고 살아왔던 시간들.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상담사는 내 기질과 전혀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며 이직을 권했다. 하지만 나는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대리님과의 정든 인연, 주임님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나를 받아줄 회사가 있을까 하는 두려움. 한때는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제는 그런 자신감조차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었다.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냐는 상담사의 말에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자기를 수용한다는 게… 도대체 뭐예요?"
이 질문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이 물음은 오히려 더 큰 숙제가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은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 되었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긴 여정의 첫걸음이었다.
[당시 TCI 검사 결과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