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계획에 없던 기회

닫힌 문과 열린 창

by 먼지잼

평범한 월요일 오후,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진동했다. 카톡 메시지였다.


"먼지잼 님, 요즘 어떻게 지내요? 혹시 이직 생각 있어요?"


화면을 보는 순간 손가락이 멈췄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팀장님이었다. 전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근무할 때 정규직 전환 기회를 마련해주셨던 분. 퇴사한 지 2년이 넘은 분에게서 갑자기 연락을 받은 것이다. 무엇보다 "이직" 그 단어가 화면에 떠오르자 심장이 한순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최근에 있었던 일들로 마음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 결심의 순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찾아온 메시지. 상황으로 본다면 기뻐서 소리를 질러야 할 타이밍이었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5개월째. 잘리고 나서 6개월 넘게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겨우 새로 시작한 회사였다. 특히, 이제 언니 동생하며 지내고 있는 대리님과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내 안에 있었다.


"한번 잘린 사람이 다시 좋은 곳에 갈 수 있을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까?"

"내 경력에는 특별한 게 없는데... 누가 날 뽑아줄까?"


텅 빈 화면을 바라보며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래,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안 되지. 일단 들어나 보자.'


팀장님께 답장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오랜만에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포지션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자 곧바로 답장이 왔다.


"먼지잼 님이 전에 하던 역할이랑 비슷해요. 스타트업인데, 서비스 기획 포지션이에요. 괜찮으면 면접 한 번 보는 게 어떨까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전 기획 경험이 없잖아요."


나도 모르게 불안이 솟구쳐 올랐다. 그러자 팀장님의 호통같은 응원이 돌아왔다.


"먼지잼 님이라면 무조건 할 수 있어요. 자신감을 가져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단 전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아직 연락이 닿는 다른 팀장님께 조언을 구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분은 이직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커리어 관리에 탁월했다.


"팀장님, 혹시 시간 되시면 통화 가능하세요? 조언 좀 구하고 싶어요."


통화를 통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팀장님은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면접은 보는게 좋겠어요. 요즘 시장 흐름도 알 수 있고, 설령 안 가더라도 먼지잼 님이 어떤 포지션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합격한 뒤에 고민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나니 용기가 생겼다. 맞다. 굳이 이직하지 않더라도, 면접을 보는 경험 자체가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정말 이 회사를 떠나고 싶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면접을 보기로.



유통회사는 휴일이 많지 않다. 배송과 유통은 멈출 수 없으니까. 대리님이 1년 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고 했을 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감했다. 나도 이 회사에 와서 주말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면접 일정을 잡으려 할 때 회사 창립기념일로 뜻하지 않게 휴일이 생겼다. 보통은 이날 회사에서 회식을 진행하는데 올해는 휴일로 대체한다고 했다. 팀장님을 통해 연락받은 회사 대표님께서 "면접은 그날 어떠세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였다. 내가 먼저 그날이 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어쩜 그 날을 짚어냈을까? 이게 운명인가? 면접 날짜마저도 이렇게 맞아떨어지다니.


면접 당일, 생각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내 안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너 정말 안정적인 회사를 떠날 수 있어?
시용기간 3개월이라면서?
그 기간이 지나면 또 직장을 구해야해.
모아둔 돈도 없고 나이는 더 들텐데
정말 그게 옳은 선택이 맞아?


전 회사에서 잘린 기억은 아직도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는 내가 스스로 나가지 않는 한 절대 잘리지 않을 곳이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그 안정감을 포기하는 게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면접장에 들어서자 대표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대표님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개발 총괄을 맡고 있다는 이사님이 앉아 계셨다. 기본적인 소개가 오가고, 내 경력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나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어떤 성과를 냈는지에 대해 최대한 간결하게, 어떤 면에서는 내 능력을 축소시켜 답변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회사에 대해 계속 질문했다. 이 회사가 어떤 서비스를 만들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지, 팀 문화는 어떤지. 마치 내가 면접관이 된 것처럼.


"저희는 예비 사회적 기업이에요."


순간, 대표님의 말이 내 귀에 꽂혔다. 사회적 기업. 이윤 추구와 함께 사회적 가치도 만들어가는 기업.


"먼지잼 님이 맡게 될 역할은 사용자들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서비스를 기획하는 거예요. 단순히 편리함을 넘어서, 그들의 삶에 의미 있는 변화를 줄 수 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건성으로 대답하던 내 입에서
갑자기 진지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사용자들을 타겟으로 하나요?"

"서비스의 핵심 가치는 무엇인가요?"


질문할수록 대표님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정말 관심 있어 한다는 걸 알아차리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알아차렸다. 내가 얼마나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면접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더 마음이 복잡했다. 새로운 일에 대한 설렘과 동시에, 지금 회사에 대한 미련이 뒤섞였다. 일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관계에 휘둘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면접을 건성으로 봤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직하고 싶다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행동으로 드러난 것 같았다. 어쩌면 도전이 두려웠던 걸지도 모른다.



3일 후, 합격 메일이 왔다.


메일을 보는 순간, 가슴이 떨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지금 회사의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특히 대리님과 주임님에게는.


집에 와서 입사하게 될 회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투자 단계는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회사의 비전은 실현 가능한지, 실제 사용자들의 평가는 어떤지. 이성적으로 따져봐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내 마음의 소리에도 귀 기울였다. 이 회사에 와서 만난 사람들, 함께 한 시간들. 그것들도 내 삶의 일부였고, 쉽게 버릴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다음 날, 대리님께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리님, 잠깐 시간 되세요? 상담 좀 해도 될까요?"


나는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면접 본 사실, 합격한 사실, 그리고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는 것까지. 예상과 달리, 대리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표정으로 커피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반나절 동안 나와 말을 하지 않았다.


오후, 갑자기 대리님이 내 책상으로 와서 물었다.


"정말 떠날 거예요?"


나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대리님은 내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마음이 없었다면 면접을 대체 왜 봤어요? 언니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임님 생각만 하네요. 고작 걔가 뭐라고 회사까지 그만두려고 해요? 그냥 있으면 안 돼요?"


대리님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나는 그냥 도망치고 싶은 걸까? 대리님의 말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마치 내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신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안정? 아니면 도전? 익숙함?
아니면 새로움?


몇 번의 긴 고민 끝에, 합격 메일에 답장을 보냈다. 시용기간 3개월. 그 기간 동안 회사와 맞지 않으면 다시 한번 실패를 맛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회사에 도착하자 대리님이 내 얼굴을 살폈다.


"결정했어요?"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대리님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을 번복할 여지를 남겨두고 싶었다.
아직은 나만의 작은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다.
keyword
이전 14화계획에 없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