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새벽 공기가 내 뺨을 스치고, 아직 덜 말라 무거운 내 발자국이 길 위에 희미한 자국을 남긴다. 출근 첫날, 커피 한 잔으로 가볍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생각했다. 이 모든 흔들림과 회복의 여정이 내 계획에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퇴사 후,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한 지 일주일 뒤, 예정했던 대로 캄보디아로 일주일 선교를 떠났다. 화성의 볕보다 더 뜨거운 캄보디아의 여름, 그 강렬한 태양 아래서 나는 역설적으로 가장 부드러운 진실을 마주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조건 없는 그 사랑의 언어 앞에서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그건 마치 실패의 딱지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번아웃은 내가 실패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왔던 증거였음을. 그리고 그러니까 휴식도 필요하다는 인생의 부드러운 배려였음을. 마치 숲을 태우는 불이 때로는 새로운 생명을 위한 준비인 것처럼.
사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그동안 몰랐던 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자기 객관화가 되지 않는다"는 말에 반발했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한다는 게 대체 뭔데? 그게 애초에 가능하기나 해? 나는 변하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존재이니 늘 일관적일 수가 없다. 변하는 도중에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 안에서 자신이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깨달은 가장 밝은 진실들이 있다. 일을 잘하든 못하든 내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상대가 내 진심을 몰라준다고 해서 내 진심이 무가치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세상이 나를 흔든다고 해서 내가 세상에 불필요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 나는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
그래서, 열심히 하되 한계에 부딪히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걸로 스스로를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
어쩌면 나는 학대에 가깝도록 나를 몰아세우며, 나를 증명하려고 애썼던 모든 시간 동안 사실은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알아줄 때까지 나를 몰아세웠다. 능력 있는 나, 쿨한 나, 사람들에게 연연해하지 않는 나라는 이상적인 가면 속에 나를 숨기고는, 울고 있는 내 손은 한 번도 잡아주지 못했다.
나를 다정하게 대한다는 게 무엇인지, 자기 돌봄이 무엇인지 깨달으면서 타인을 더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실수에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 기다림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게 되었다. 누군가를 속으로 판단하고 욕했던 시간들, 속에서 열불이 나고 천불이 나서 스스로가 미웠던 시간들이 눈 녹듯 사라졌다. 타인의 실수 속에 미운 내 모습을 발견하지 않고, 기다려주고 다정하게 말해주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간 내가 미워했던 누군가는, 그 모습 속에 비친 연약한 내 모습이 싫어서였다.
무릎 꿇었던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행복들.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조심조심 살았더라면, 어쩌면 영영 깨닫지 못했을 일들. 최선을 다해 달렸기에 넘어졌고, 넘어졌기에 일어날 수 있었다.
지금 새로운 사무실에서, 나는 가끔 텃밭의 상추를 떠올린다. 그리고 바나나 우유와 오예스를 마주할 때마다, 잠시 멈춰 서서 그 시간을 기억한다. 내가 무너졌던 곳, 그리고 다시 일어섰던 곳을. 계획에 없던 번아웃과 회복이 남긴, 작지만 강렬한 기억의 조각들을.
누군가가 인정해주든, 인정해주지 않든 난 내 모습 그대로 괜찮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무거운 갑옷을 벗어던진 것처럼 가벼워진 어깨로,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부드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 조금 더 나답게.